드라마 속 장애를 가진 캐릭터의 정형성을 보여준 '지리산'의 서이강
드라마 속 장애를 가진 캐릭터의 정형성을 보여준 '지리산'의 서이강
  • 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 승인 2022.01.1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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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방송된 드라마 중 방송 전부터 가장 기대와 화재를 모은 드라미는 <지리산>일 것이다.

<싸인>, <유령>, <시그널>, <킹덤> 등을 쓴 김은희 작가와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등을 연출한 이응복 연출가가 만난 작품이라는 것은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이들의 조합이 낳을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내가 기대감을 가졌던 포인트는 우리나라 드라마 사상 최초의 휠체어를 탄 레인저, 그것도 여성레인저 서이강을 멋진 전사 포스가 풍기는 전지현이 맡았다는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설레었다.

지리산 레인저였던 서이강은 지리산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다 사고를 당했고 척추가 다쳐 장애를 가지게 된다. 이런 그녀가 레인저로 그 업무, 그 현장으로 휠체어를 타고 복귀하는 장면은 너무 신선했고, 이에 따른 인식과 업무 지원 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설정 했다는 것에서, 휠체어를 탄 그녀의 멋진 실루엣은 캐릭터에 대한 기대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캐릭터의 기대감은 우리도 이제 미드나 영드의 수사물이나 범죄 스릴러물에서처럼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온갖 첨단장비를 활용해 범인을 쫓고 추격하는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때가 온 것인가? 로 이어지며 요즘말로 심쿵했었다.

 

구시대적인 장애인식이 그대로 재현된 캐릭터, ‘서이강’

이 심쿵이 바로 실망으로 바뀐 것은 서이강 혼자 산을 타는 장면이었다. 
거의 넘어진 휠체어에 카메라를 들이댄 후, 휠체어에서 떨어져 뒹굴고 구르며 더 이상 오를 수 없어 몸부림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결국 동료의 등에 업혀 내려가는 모습은 정말 허탈했다.

장애를 한계와 결함으로 보는 기존 인식에 꽉 막혀 있는 것 같아 숨이 막혔고, 동료애에만 기댄 해법은 결국 신파에 절어 도움 없이 혼자는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이미지, 그래야 산에 오를 수 있다는 변함없고 정형화된 이미지에 절망했다.

이런 메시지는 장애를 가진 레인저의 한계와 결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마지막 회 엔딩 신에서는 서이강의 휠체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두 다리로 지리산 정상에 서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장면까지 연출한다.

이 엔딩으로 무얼 말하고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장애는 고칠 수 있고 산은 걷는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장애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장애의 본질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비장애인 중심의 편견과 편협, 왜곡과 오만이 내재된 캐릭터인가? 제작진, 특히 김은희 작가라서, 또 제작진의 인지도와 이미지의 파급력을 감안하면 이들의 잘못된 장애인식이 가져올 무서운 결과들이 두려워진다.              

 

<지리산>에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레인저 ‘서이강’은?

이처럼 우리나라 드라마 속 장애 캐릭터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편견과 혐오, 무지와 차별의 시선이 내재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다양성이나 개인, 개별이라는 키워드보다는 평균, 중간, 특출, 특별과 같은 맞추기 쉽고 우생학적 키워드를 지향하는 인식과 사회시스템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이 부류에 낄 수 없는 다양한 이유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미디어는 깎아내리거나 아니면 아예 특별함, 천재성으로 포장하거나, 좀 더 착한, 순진한, 순수한 등의 이미지를 덧씌워서라도 함께 가야한다는 무의식적 우월감이 내재된 집착으로 보일 만큼 드라마 속에서 소수성의 본질을 왜곡하고 극을 위해 이를 활용하는 캐릭터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시청자인 나는 이런 캐릭터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늘 불편하고 과연 저렇게 모를까? 의문에 의문이 든다.

나는 늘 상상한다. 미디어 속 장애캐릭터가 보다 다양성과 개인 중심적이며, 개별화와 소수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랬다면 서이강이 산악 휠체어를 타고 산을 누비며 조난자들을 구하는 멋진 레인저로 활약하는 거침없는 모습들로 연출됐을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산악휠체어가 한 대에 천만 원 정도 하기 때문에 개인이 사기엔 부담스러운 현실과 그래서 산행 시 이용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거나, 비장애 중심의 산행환경을 꼬집으며, 누구나 산을 즐기고 산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와 이를 보조하는 산악휠체어나 보조장비 등의 보급과 지원방법들을 고민하게 하는 대사나 에피소드, 영상 등을 구현해냈을 것이다.

이 뿐인가. 산에서는 전동과 수동 휠체어 중 어떤 게 더 편리한지 등 장애를 가진 산악인을 위한 정보도 자연스럽게 극 속에 녹여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장애를 가진 레인저나 산악인을 장애라는 겉피를 걷어낸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에 있으며, 그랬다면, 장애를 사라지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장애의 본질을 부정하는 잘못된 결말은 제작진의 뇌리에서조차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미드나 영드를 비롯해, 미디어나 인권 감수성이 선진국인 나라들의 드라마를 보면 이미 장애캐릭터와 비장애 캐릭터 역할의 경계가 허물어졌음은 물론이고,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도움 없인 할 수없는 것들이 많은 열등한 존재이고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돕는 우월한 존재로 보는 시각과 인식은 깨져 버린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나라 미디어 콘텐츠 특히 드라마 제작자나 제작진들에게 몇 해 전 정말 공감하며 본 클레이 애니메이션 <메리와 맥스>에서 자폐 스펙트럼장애를 가진 맥스의 대사인 “나는 치료받고 싶지 않아. 나는 아스피인 게 좋아. 나를 바꾸려고 치료하는 것은 내 눈동자 색깔을 바꾸려는 것과도 같아.”를 전하고 싶다. 

미디어가 당사자의 눈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보이는 것들, 하고 싶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느 누구든 당사자의 생각이 배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드라마가 보고 싶고, 보여줄 의무가 있음을, 그래서 이 시대, 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무엇가가 연대감을 건드린다면,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함께’라는 의식과 위로를 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르라는 것, 즉 드라마 관계자들이 드라마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때임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