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있는 나의 해방과 당신의 해방은 다른 것인가?
장애가 있는 나의 해방과 당신의 해방은 다른 것인가?
  • 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 승인 2022.05.03 2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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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 리뷰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Crip Camp, 2020 제작)
감독_니콜 뉴넘, 제임스 레브렉트
미국 | 다큐멘터리 | 15세이상 관람가 | 107분

나의 권리를 존중하는, 내게 맞춰진 세상으로 가는 투쟁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는 1971년 여름, 미국의 장애인권운동의 태동이었던 ‘제네드 캠프(1951년에 시작되어 1977년까지 열렸다.)’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10대 장애 청소년들의 설렘 가득한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어진 공간의 모습은 휠체어 동선을 고려한 통로, 계단을 없앤 건물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사용이 편리하도록 동선과 높이를 고려해 만든 화장실을 비롯해 조리실, 토론장, 심지어 레저 활동까지 갖춘 캠프장이 비쳐진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언어장애가 있는 친구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거나 무시당하지 않고 끝까지 귀 기울여 듣는 청자들과 토론하며 소통한다. 이곳에서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하고, 공동의 문제를 결정하기에 앞서 치열하게 토론한다. 사랑의 감정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현할 권리와 자유가 있는 곳. 장애인은 성욕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인식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 개인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평등한 관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두에게 낙원 같은 공간이 흑백 영상으로 펼쳐진다. 

히피들이 주관했던 이 캠프는 그들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의 세계관과 닮아 있었고, 온전히 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받는 세상을 옮겨 놓은 듯했다. 처음으로 내게 맞춰진 세상에서, 존중받는 나를 경험한 이들이 현실로 돌아오는 마음은 어땠을까?  

카메라 앵글은 뒤이어 캠프에 참가한 ‘짐 러브렉트’, ‘주디 휴만', ‘데니스 제이컵스’, ‘닐 제이컵스’ 부부의 현재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제네드 캠프에서 경험한 일들을 회상하면서 “나에게 맞게 지어진 세상에서, 마음 편히 다닐 수 없는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숙연해졌다. 

첫 화면부터 엔딩까지, 이들이 경험한 제네드 캠프 안에서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 공간과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고, 이후 이들의 달라진 삶의 태도와 시선, 그리고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자각과 이를 찾기 위한 투쟁의 동기와 목표가 제네드 캠프였다는 사실, 그 때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이 장애인권운동 활동가들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장애인들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장애인들만 과거에서 살도록 설계된 사회였다. 그래서 집이나 시설에 갇혀 가족들의 돌봄에 의존하며 자기결정권을 행사해볼 수도,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 세상이었다. 당연히 캠프에 참가했던 장애청소년들에게는 충격이었고, 세상에 대해 분노와 억울함이 차올랐을 것이다. 

더 이상의 기다림과 양보는 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고, 생존의 문제라는 절박함이 투쟁으로 분출되었다. 투쟁에 온 몸을 바치는 모습은 존경스럽고, 쥬디 휴만이 “분리를 멈추라”고 선언할 때는 동조자가 아닌 사람도 이들의 투쟁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포스가 감지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미국의 장애인권운동의 태동과 역사를, 특히 1972년 윌로브룩 병원의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학대와 방임, 수용시설의 열약한 환경 등이 의도치 않게 언론에 공개되면서 촉발된 장애인들의 탈시설화 요구와 미국의 장애인 차별 금지법의 ‘재활법 504 조항’ 제정 요구가 예산을 이유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집행 사인을 거부했을 때 시민들의 불편함이 야기될 수 있고, 이로 인해 따라오는 비난과 혐오를 감수하더라도 점거 농성에 들어가는 쥬디 휴만이 이끄는 DIA(Disabled In Action)의 행동에 시청하는 많은 이들은 박수치지 않았을까.

결국 1973년 ‘재활법 섹션 504’의 집행 란에 보건복지부장관의 사인을 받아냈고 ADA법 제정까지 이뤄냈던 일련의 투쟁 과정을 듣고 가감 없이 보여주는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를 통해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을 목도하면서 사람들은 이 투쟁이 이들에게 왜 이렇게 절실했고, 이들의 요구들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는지, 결국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쥬디 휴만을 비롯한 장애가 있는 활동가들의 주장을 충분히 납득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은 기본 소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들의 다소 고자세의 어조를 그대로 전하며,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주체적 투쟁이었고, 권리 투쟁이었다는 펙트에 주목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강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 한장면 

 

‘Ugly Law(어글리 로)’를 폐지시킨 반전의 주역들

사실 미국은 195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은 ‘Ugly law(어글리 로)’라고 부르는 몇몇 지방조례가 있었다. 시카고에는 1974년까지 이 법이 존재했는데, 중심 조례를 보면 신체 절단이나  몸이 다른(기형)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시민들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공공장소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공공생활에 흐름을 방해하지 말 것을 규정했다. 

이런 조례들은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뉴올리언스, 덴버, 오마하 등 미국 전역으로 퍼져있었으며, 흑인과 빈곤층,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상자였다. 이 어글리 로를 어기면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갇혔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혐오감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 사회진화론이나 우생학이 대두되면서 장애인을 공공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그들을 사회에서 거세시켜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 비문명 사회의 법을 바꾼 반전의 주인공들이 다름 아닌 이 법의 대상자였던 흑인들과 히피들이 주최한 제네드 캠프였고, 이 캠프를 통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자각한 장애 당사자들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결국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하거나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소수가 겪는 차별은 같은 것이며, 이들의 공감과 연대는 그만큼 단단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인상에 남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DIA가 보건교육복지부 샌프란시스코 지소를 점거해 투쟁할 당시 흑인 인권운동 단체 '블랙 팬서'가 와서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이들은 자신들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연대하는 이유에 대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전체적인 장면들이나 투쟁과정에 대한 인터뷰 장면에서 휠체어를 탄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투쟁이었음이 전해지지만, 이들이 전부가 아님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숨겨진 장애, 뇌전증 장애에 대한 언급도 있었고, 점거 상황에서 수어로 유리창을 통해 외부와의 소통을 담당했던 농인들도 있었다. 이 투쟁이 촉발된 사건인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 한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세상을 바꾼 주역이었고, 함께 했기에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특히 쥬디 휴만을 비롯해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데니스 제이컵스 같은 장애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욕망, 분노에 솔직했고, 무엇보다 말의 힘과 즉각 반응하고 움직이는 몸의 힘이 전해지는데, 이 투쟁의 의지와 열정에서 나오는 포스이기에 존경스러웠다.      

 

1972, 뉴욕의 멘하탄의 도심 한복판, 샌프란시스코의 보건교육복지부 지부, 그리고 2022년, 서울의 경복궁역과 대통령 인수위 건물 앞

1972년 DIA의 외침은 당신들(비장애인)과 같이 우리도 같은 공간, 같은 조건에서 이동하고, 교육받고, 생활할 권리가 있는 시민임을 인정하라는 것과 그렇기에 평등을 가장한 분리평등정책을 멈추라는 것이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당신들만이 누리는 권리로 인식하고 지향했던 비문명 사회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권리를 개인이 가진 다양한 상황과 의사에 따라 지원해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을 지향하는 문명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한 걸음을 떼는 것이며, 결국 우리 모두의 편리와 안전을 확보하는 것임을 알리고 설득했고 그래도 거부하는 결정권자에게 온몸으로 저항하고 투쟁한 것이다. 

지금도 회자되는 이 투쟁에서 얻어낸 미국의 재활법 504조항과 탈시설 법, ADA 법 등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어서 법의 실효성을 거두고 있다. 그 이유로 당사자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라고 평가되고 있다.

@박경석

2022년 우리나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와 장애인들의 20년 하고도 100일의 외침도 다르지 않다.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과 같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동해 일할 권리가, 교육받을 권리가, 집이나 시설에 갇힌 분리의 삶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함께 어울려 살 권리가 있는 시민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동권 보장과 탈시설 화를 위한 지원 확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 등을 장애권리예산으로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시민으로써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들이고 마땅히 해야 할 요구들인데도 온몸을 받치고 차마 글로, 입으로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들으며, 혐오의 시선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시민들의 모욕을 고스란히 감수하며, 20년 넘게 투쟁해 온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은 사과는 커녕 꿈적하지도 않는다. '볼모'와 ‘인질’ 같은 극혐을 자극하는 단어를 사용하며 투쟁방식이 비문명적이라고 몰아가며 오히려 시민들의 혐오와 냉대를 이끈다. 

얼마 전 방송토론회에서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 입에서 당사자성의 위험함을 이야기하며, 장애인을 돌보는 가족 편에서 생각해주는 척하는 언변과 제스처로 장애인들의 20년의 외침, 시민권 보장을 위한 요구들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거부하도록 여론을 부추겼다. 

이것이 2022년 우리나라 정치의 현재인 것이다. 이보다 더 비문명적이고 후퇴한 정치가 있을까? 정치인의 덕목인 교감과 소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때 미국은 세계경제대국이었고,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세계 11위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든 장애인권리보장을 위한 정책과 법은 항상 ‘경제적 비효율성’을 이유로 뒷전으로 밀려나 기다리라는 답변과 ‘폐지’라는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다. 쥬디 휴만은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재활법 504조항이 제정된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접근성 있는 화장실로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면 내가 우리 사회에서 평등해질 날이 올까요?"라고 말한다. 이후 ADA법이 1990년 제정되고 3년이 지나 폐지를 막아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 DIA와 장애인들은 또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예상은 했고 이들의 의지와 열정도 알았지만, 예상보다도 더 덤덤하고 처연한 모습에 슬펐다. 경복궁역 지하철 시위 현장에서 온몸으로 투쟁하는 장애인권운동가들, 또 556명의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삭발식 현장에서도 덤덤함과 처연함이 똑같이 감돌았다. 슬펐다.  

 

평등이란?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되었고. 조금 더 끌린 ‘장애는 없다.’라는 문장.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 문장과 연결된 작품의 메시지가 18년 전, ‘장애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게 끊임없이 했던 장애와 평등에 대한 질문에 '장애는 불평등한 사회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며, '평등이란 이 불평등한 사회가 만든 장애라는 단어를 없애는 것'이라는 결론을 다시 내렸다.  

보건교육복지부 샌프란시스코 지소 점거농성 때 회의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수어 통역사 없이는 회의를 시작하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어 장애가 있는 활동가에게도 한사람에게 한번 씩은 반드시 의견을 묻고 끝까지 경청한다. 제네드 캠프의 토론 규칙을 그대로 가져와 이렇게 한명 한명의 의견도 소외시키지 않고 투쟁과정의 모든 사안을 결정했다. 평등이란 모든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함께 하고 갈 수 있도록 규칙과 환경을 만드는, 이런 것이 아닐까?

이런 평등한 규칙과 황경으로 나의 해방은 완성된다. 장애가 있는 나의 해방과 당신의 해방이 다른 것인가? 아니다. 장애인이 다닐 수 없는 길을 비장애인들 대부분은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계단보다 경사로가, 경사로 보다는 평지가, 에스컬레이터보다는 엘리베이터가, 그리고 문턱이 없고 인도와 차도 사이의 턱이 없는 도시가 누구에게나 안전하고 편한 도시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다르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장애인들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투쟁 하는 현장에서, 또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이 삭발과 단식 투쟁을 하는 현장에서 절박하게 외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친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동 권을 보장하라."

"발달장애인도 인간이다. 지역서회에서 어울려 살고 싶다. 24시간 지원체계 구축하라."

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권 요구가 행동들이 비문명적이라며 그리도 비난 받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으며 혐오와 배척을 당할 외침인지 이 땅의 정치인들과 시민 분들께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