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 발달지연, 개인 아닌 사회문제로 바라봐야
영유아 발달지연, 개인 아닌 사회문제로 바라봐야
  • 이우철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27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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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영유아와 가정을 위해 지역사회가 해야 할 일 #1

“후보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방선거의 시즌, 제가 살고 있는 자치구에서도 구청장 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제안을 위한 간담회와 토론회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우리구 장애인정책연대는 7개의 정책제안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버킷햇(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한 여성 분이 가장 먼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장애인부모연대지회장을 맡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는 없지만, 지난 장애인의 날 행사를 위한 영상편집 업무를 맡았을 때 단발인 어머님의 얼굴을 적어도 수십번 뵈었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촬영을 하고 나신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을 위한 1박 2일 집중 결의대회’에서 삭발을 하셨고, 그로 인해 버킷햇을 쓰고 오셨던 것이겠죠.

며칠 전 또 한번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25일자 웰페어이슈 기사(발달장애인 가정 ‘또 비극적 선택’… 전국장애인부모연대 ‘24시간 발달장애인 지원체계 구축’ 투쟁 나선다)에 따르면 서울에 살고 있는 40대의 엄마와 발달이 느린 6세의 아이가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2020년 3월 제주, 같은 해 4월 서울, 6월 광주, 2021년 2월, 4월, 5월, 2022년 3월에만도 2건의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는 표면적이고 건조한 숫자 속에 드러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일들이 과거에도, 지금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당사자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연대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는 커녕 지역사회 내에 제대로 된 지원서비스도 제공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은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삶을 선택하는 것보다 쉬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라며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그들 옆에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기사 중)

 

부모연대가 규정한 말처럼 현재 우리 사회에서의 장애인의 삶은 지역사회 내 제대로 된 지원서비스도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그들에게 책임과 감당을 떠밀고, 기다리라고만 해야 할까요?

 

장애가 있거나 발달이 느린 영유아(이하 장애 영유아)의 삶은 어떨까요. 또 그들을 키우고 있는 가족의 삶은 어떨까요.

지난 2021년 6월 개봉한 영화 ‘까치발’에서는 딸의 까치발이 엄마의 불안이 되어 겪는 어려움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까치발처럼, 아이의 보호자들은 저마다 가진 까치발로 대표되는 '장애'를 받아 들고 상황을 더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영유아기의 생애주기에서는 ‘성장’과 ‘발달’이 주된 키워드이기에, 이곳 저곳 쫒아 다니며 끊김 없이 치료를 받으러 옮겨 다니는 ‘재활난민’이라는 신조어가 이제는 익숙한 말이 되어 버린지 오래이지요.

장애인 복지의 패러다임이 의료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십수년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ICF)가 생체심리사회적 모델(Bio-Phycho-Social model)로 볼 수 있는 바,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을 통합시키려고 하는 개념(WHO, 2001)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지만, 사실 장애 영유아와 가족에게는 와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왕왕 듣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아이 발달을 위한 치료가 급한데, 의료적 관점이니 사회적 관점이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장애인복지관 욕구조사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 ‘치료서비스’ 인 것이겠죠.

이처럼 성장과 발달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최우선적으로 원하고 필요한 ‘의료적 관점’인 치료를 배제하고 ‘사회적 관점’으로 지역사회에 장애가 있어도 잘 살게 하라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요? 그렇기에 항상 장애 영유아와 가족의 목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소외되는 건 아닐까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가는 과정과도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에는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영화 속 문구처럼 아무리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앞에 ‘장애’라는 단어 하나가 붙으면 어떨까요?

그들의 삶은 아이의 장애(혹은 발달이 느리다는) 단어가 붙게 된 후로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보고 ‘신청’해야 하며, 그 또한 수많은 기다림 혹은 높은 비용을 지불하여야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그마저도 굉장히 제한된 시설 위주의 서비스로 이리 저리, 정신 없이 돌아다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애석하게도, 이마저도 또 제한된 기간이 있어 곧 ‘종결’이라는 선이 기다리고 있지요. 선을 넘으면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아이와 가족의 황금기와도 같은 일상을 놓치고 나면 아이가 훌쩍 커버려 ‘진학’에 대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영유아기를 보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영유아기를 보내는 가정에게 ‘공공’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많은 기준이 ‘소득’이 되어 낮으면 낮은대로 힘들고, 높으면 높은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없는 ‘공공’의 현실입니다. 이번 정부 국정과제에도 포함되었지만 여전히 장애영유아에게는 ‘조기발견’이 가장 중요한 ‘공공’의 이슈이며, 발견 후에 대한 내용 역시 ‘비용’으로 연결되어 ‘소득’이 기준이 되고, ‘선별적’이고 ‘제한적’인 제공자 중심의 서비스로 편입시키는 체계입니다. 과연 이 체계를 ‘공공’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애 영유아의 성장과 발달을 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공공’의 역할이 전무하다보니, 당사자가 스스로 책임지며 장애를 고치거나 기능을 향상시키게 하는 ‘의료적 관점’에 매몰되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영유아에 대한 지원은 조기 발견 후 종합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을 가진 지원체계로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유아의 발달지연 상황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겠죠. 사회문제로 바라보게 된다면 지금의 신청과 선별에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서비스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장과 발달이 가장 중요한 생애주기이니 만큼 이에 대한 다영역의 전문가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며, 한명의 아이와 가정을 중심으로 구성된 지원서클이 아이와 가정 각각의 특성에 맞는 개인별 지원이 행해져야 합니다. 더하여 효율성, 실적, 양적 성과에 취약하므로 이러한 논리가 개입되지 않도록 관리되어야 하겠죠. 저는 종사자로서 이것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건만 마련된다면 지금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더 이상 무미건조한 글로 비극을 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극을 3자의 눈으로 접하는 이들이 이것을 ‘사회문제’이자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가장 취약한 계층인 장애 영유아와 가정의 어려움을 사회가 함께 해결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앞으로 저는 몇편의 글을 통해 장애 영유아에 대한 사업 실천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지역사회가 해야 하는 역할과 이루어졌을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