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으로 인도하는 키워드, '반항과 저항'의 가치를 전하다
공존으로 인도하는 키워드, '반항과 저항'의 가치를 전하다
  • 백수정(대중문화 비평 활동가)
  • 승인 2023.02.07 0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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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Roald Dahl's Matilda the Musical, 2022)
감독-매튜 워처스 | 영국 외 | 코미디 외 | 2022.12.25 개봉 | 전체관람가 | 122분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포스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의 원작은 소설이다. 이를 1996년 미국 ‘트리스타 픽쳐스’가 영화로, 2022년에는 뮤지컬영화로 영국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원작 <미틸다>를 쓴 ‘로알드 달’은 내가 좋아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해, <판타스틱 Mr, 폭스>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들 대부분이 영화나 뮤지컬로 제작되었을 만큼,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약자들의 혁명,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반항하는 약자들의 영웅, 그리고 소소하고 유쾌한 복수와 결국은 정의와 선이 이긴다는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이 영화에도 ‘로알드 달’의 약자들의 대변자이자 반항아의 계보를 잇는 ‘마틸다 웜우드’가 있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사회는 가정과 학교일 것이다. 
이 두 사회에서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부모와 선생 등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무례와 억압, 폭력과 학대를 먼저 경험하는 아이들의 현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마틸다 웜우드’가 마주한 현실이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빠로부터 무관심 속에 사랑과 보호는커녕 방치되고 부모의 구박 속에서 자란 ‘마틸다’, 아빠는 심지어 딸인 ‘마틸다’를 매번 아들이라고 부르며 학대한다. 교육 받을 권리도 박탈당한 채 유일한 친구는 이동 책방의 사서인 ‘펠프스’ 부인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교육청 입학 담당자가 방문해 ‘마틸다’의 입학통지를 무시하고 학교를 보낼 마음도 없는 ‘웜우드’부부에게 벌금을 물게 한다. 화가 난 ‘웜우드’ 부부는 ‘마틸다’를 학생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로 악명이 높은 ‘트런치볼’교장이 있는 ‘크런켐 학교’에 보내버린다.

이 학교의 교장은 힘도 없고 몸도 작은 아이들을 구더기 같은 존재라며 폭언을 일삼고 무시와 억압, 통제로 지배하려 한다. 이렇게 못된 어른들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불평등함에 반기를 들고 이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마틸다’. 정당함과 간절함에서 발현되는 상상의 힘, '마틸다‘에게 초능력이 생긴다. 이 힘으로 교장에게 소소하지만 유쾌하고 통쾌한 복수를 하며, 자유와 해방을, 아이다울 수 있는 권리를 마음껏 누리며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혁명을 이끈다. 멋지고 설레지 않는가.

이 영화의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게 전해지는 장면이 있다. 
아이들에게 폭언과 협박은 교육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교장은 아이들을 철저히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만의 기준에서 학생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학생을 ‘초키’라고 부르는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다. 교장의 이런 완력과 독재에, “나는 반항아로 태어났다”며 “너희의 자유를 누르는 모든 것에 반항하라”고 ‘마탈다’가 노래한다. 그리고는 교장의 부당함과 잘못에, 급기야 ‘안 돼!’라고 말하며 반기를 든다. 

‘마틸다’의 용기 있는 외침에, 그동안 교장이 무서워 참고만 있었던 허니 선생님과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맞아. 우리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라며 깨달음을 토해내는 합창이 이어지고 용기를 갖게 된 아이들이 자신들은 반항아라고 선언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레미제라블>의 명장면이자 명곡인 'Do you hear the people song?'을 부르는 장면이 오버랩 되며, 영화 <미틸다>를 왜 뮤지컬영화로 리메이크했는지가 명확하게 전해졌다. 

어른들의 억압과 통제에서 자유롭고 해방되고픈 아이들의 갈망이 가사와 곡조에 실리고, 결기로 가득 찬 마음이 춤에 실린다. 소름이 돋을 만큼 공감됐고 연대의 끈을 굳게 매었다.

맞다. 나는 반항아로 태어났다. 사회의 통념과 관습, 관행으로, 생명의 존엄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항한다. 나도 모르게 이 말을 되뇌이면서, ‘반항은 나쁜 것’, 특히 아이가 어른에게 반항 하는 것을 죄악시 하고 금기시 하는 우리의 교육, 순종과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의 교육을 되돌아보게 됐다. 이런 교육의 종착역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다. 만족스러운가?

힘 있는 다수(어른)의 자유와 편의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에 반기를 들고, 이것의 잘못과 불합리, 불평등을 말하며 저항하는 이들을, 힘없고 약한 이들의 불평과 떼쓰기로만 몰아가며 입을 막는 사회, 다수의 편의와 효율성, 이익만을 앞세워 약자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얼마나 될까?

이 영화를 보면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와 관련한 언론보도와 시민들의 혐오와 조롱이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댓글들, 시위현장의 영상이나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오버랩 되었다. 시민들의 불편과 고충에는 진심으로 공감하지만, 이렇게까지 온갖 모욕적인 욕설과 폭력을 당할 일인가, 또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고 적으로 몰아갈 일인가 많이 억울하고 분노가 치민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장애인의 이동권과 탈시설, 교육권, 노동권 등을 요구해왔다. 이 권리들은 헌법이 규정한 국민으로써, 시민으로써 당연하게 누려야 할 기본 권리들이다. 이 외침에 모든 정부가 경제가 힘들다, 예산이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며 회피하고 외면해 왔다.  

여기서 잠시 전장연이 외치는 구호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자.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하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볼 일을 보는 것 비장애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히 주어지는 일상이고 누리는 것들이지 않나? 그러나 장애를 가진 우리들은 오랜 세월 이렇게 외쳐도, 이렇게 모욕과 치욕의 욕설을, 신체적, 심리적 폭력을 당하며 알려도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상이며, 생존의 문제, 인간으로써 존엄할 권리를 부정당하는 문제가 된다.

지하철만 해도 그렇다. 휠체어를 타거나 보행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탈 수가 없다. 리프트가 있지 않냐고 되물으신다면 타 보셨냐고 되묻고 싶다. 얼마나 불안하고 위험한지, 리프트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되묻고 싶다. 무엇보다 리프트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매일 감수해야 하는 ‘집에 있지 왜 싸돌아 다녀’라며 쏘아보는 시선들과 말들을 당신들이 받아보고 들어봤는지 되묻고 싶다. 이는 교육과 노동, 생활 모든 활동에 기본이며 연결되어 있지 않나. 그래서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과 버스가 시위의 모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이 시민들의 불편을 초례하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리한 시위 방법임을 ‘전장연’도 알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택했다는 것,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들을 먼저 생각해볼 수 없을까? 시위의 책임과 해결의 키는 누가 가지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위한 것들인지를 생각해볼 겨를을 시민으로부터 빼앗아버린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또 이유 불문 하고 시위 자체를 부정하고 시위 당사자들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삼는 나라에서 말이다.

‘시위’에 대해 그동안 정치 권력자들이 심어 놓은 불법적이고 불손한 행위라는 이데올로기와 민주주의의 당연한 권리 ‘저항과, 투쟁, 반항’을 나쁜 것, 어른에게 대드는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가르쳐 온 우리 교육, 순종과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반향과 저항, 투쟁’은 모든 생명이 자신을 지키는 본능이자 행위이며, 이 행위로 완벽과 획일을 지향하는 세상에 태클을 걸어 모두를 지키는 것이다. 반항과 저항을 존중하는 그 사회는 강자와 약자의 개념도 경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며, 자연히 아이가 어른의 잘못을 꼬집으며 반항하는 것을 버르장머리 없다고 머리를 쥐어박는 무식한 어른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시민으로써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하며, 약자라는 이유로 생존권과 존엄성을 위협받아 온 장애를 가진 시민들이, 현실의 불평등과 불합리를 외쳐 온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외면만 해 오다가, 다수의 편의와 이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강자 프레임에 씌우고 약자라고 하기엔 너무 강해보이는 다수의 시민들과의 동행을 선언하는 시장의 기만과 억지에 장단 맞추는 시민이나 사회는 더욱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건강한 행위이고, 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옳고 정당한 행동이라며, 귀 기우리고 잘못을 인정하는 어른과, 사회가 있을 뿐이지 않을까?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이 영화가, 또 ‘로알드 달’의 소설들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 지고 만들어졌지만, 어른에게까지 오랜 시간 사랑받고 읽혀지는 것은, 모든 이들이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힌트를 주고,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힘이 있어서일 것이다.

 

P.S.

영화 <로알드 달의 마틸다>. 한국에서는 ‘전체관람 가’ 등급이지만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PG(부모의 가이드가 필요함)’ 등급이다. 가장 걸렸던 부분은 선악캐릭터의 외모가 워낙 극과 극이어서 외모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살짝 되기도 한다. 물론 맥락적으로 분명히 분별할 수 있게 전개가 되지만 맥락을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유아들은 부모나 양육하는 어른이 함께 보면서 외모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자리하지 않도록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줄 것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