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배분? 망할 놈의 구조(Structure)가 문제다
자원배분? 망할 놈의 구조(Structure)가 문제다
  • 승근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12 2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원 부족, 배분 문제 아냐

공평과 평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그림입니다. 
세 명의 아이들이 야구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키 차이가 꽤 있어 보입니다. 반면 주어진 상자는 같은 높이와 크기를 가졌습니다.

네 맞습니다. 공평하지 않습니다. 모두 똑 같이 야구구경을 하고 싶지만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못 보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앞선 그림의, 불평등한 상황을 평등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세 명의 친구들이 이제는 똑같이 야구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기 좋아 보이시나요? 평등은 이루어졌겠지만 공평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그림을 다시 봅시다.

우선 가장 키작은 친구는 가장 키 큰 친구의 상자를 얻어 야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가장 만족스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친구는 그러한 친구를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자신의 상자는 그대로 인 채 상황이 변한 것이니까요. 이제 키 큰 친구를 볼까요? 불끈 쥔 손을 하늘로 뻗어서 응원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 있지만, 이 그림은 전혀 공평하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키 큰 친구는 자신의 상자를 내어 줌으로써 조망권이 위축되었습니다. 멀리 볼 수 없고 얼굴만 간신히 내밀었습니다. 가장 큰 친구가 주먹을 하늘로 올린 그림은 웬지 화가 난 것 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우둔해서 가장 작은 친구에게 상자를 뺏앗긴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몫을 뺏앗긴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본다면 가장 작은 친구는 왠지 약삭빨라 보입니다. 이제는 가운데 친구까지 그리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상황을 방관한 채, 자신의 몫이 그대로 인 것에 대해서만 만족해 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친구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평과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저 상자 세개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에 대해 논의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공평과 평등에 대한 가치를 기준으로 분배의 정의를 피력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림을 좀 더 넓게 보도록 합시다. 이제 상자의 세계에서 벗어나겠습니다. 주어진 현상에 대해, 주어진 조건들만을 고민하기 보다는 현상과 조건들을 모아도 보고, 분해도 해 보는 것입니다.

자원의 배분이 문제 아니라 구조적인 모순

다시 시작해 볼까요?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공평과 평등, 그리고 분배에 관한 이야기는 상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지점은 대다수의 야구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관중석입니다. 그에 반해, 세명의 친구들은 관중석에 앉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 서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그림은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문제입니다.

공평과 평등, 자원의 분배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인 것 입니다. 편하게 관중석에 앉아 야구를 구경하는 사람과 울타리밖에서 야구를 보기 위해 상자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사회적 모순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지속시키는 울타리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즉, 문제의 원인은 상자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울타리입니다. 관중석과 구별하기 위하여 둘러처진 바로 저 울타리. 야구 구경을 못하게 하는 저 울타리가 문제의 원인입니다. 상자가 주어졌기에 '상자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자는 자원을 의미합니다. 권력자들은 반복해서 상자(자원)를 이야기하며 구조(Struture)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원은 언제나 풍족하지 않습니다.

자원의 분배가 한계에 놓이면 사람에게 문제를 돌립니다. '니가 너무 커!', '너는 크니 자원을 내어 놓아!' 이 요구를 거부하면 욕심많은 사람이 되고, 이 요구를 승인하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자원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운 희생이라 미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서 있어야 하며, 반면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앉아서 편하게 야구를 구경합니다. 그들은 논의의 중심에 울타리를 절대 올려 놓지 않습니다. 

진정한 분배를 위해서는 자원(상자)과 사람(약자)이 아니라 구조(울타리)를 논의의 중심에 올려 놓아야 합니다. 이제 울타리를 논의의 중심으로 올려 놓아 보겠습니다. 

 

'울타리를 톱으로 잘라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 친구는 똑같이 가지고 있는 상자 위에 걸터 앉아 야구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얼마되지 않는 갯수의 상자, 튼튼하지도 않은 상자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나누었냐?'에 따라 '너는 착하다. 너는 약싹 빠르다. 너는 우둔하다' 라고 사람을 평가하기 보다는, 저 울타리라는 구조를 걷어내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 친구들에게는 다툼이 없을 것입니다.

격차, 배제, 차이를 만들어낸 구조를 개선하지 아니하고, 많지도 않은 자원과 사람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지양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대상은 저 울타리, 구조이기를 희망합니다. 

1800년대 초 1차 산업혁명 시기에,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방직기계를 부수고 불태워 버립니다. 영국정부는 그런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영국 시인 바이런(George George Byron)은 그러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자가 잘못한 것일까? 기계가 잘못한 것일까? 아니다. 망할 놈의 정책때문이다'.

러다이어트 운동이 일어난 지 200년이 흘렀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분배와 정의', 그리고 '평등과 공평'에 대해 이렇게 치열한 논쟁을 한 적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정된 자원, 그리고 사람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이상 해결될 수 없는 논제이기 때문입니다. '분배의 문제일까? 공평의 문제일까? 사람의 문제일까? 아닙니다. 망할 놈의 구조의 문제입니다.'

리더들은 구성원들이 구조를 볼 수 있도록 관점을 넓혀주어야 합니다. 한정된 자원, 사회적 약자에게서 그 해답을 찾으려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고 사람들을 교화시켜야 합니다. 구조라는 진정한 문제의 원인을 건드리지 않으면 사람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게 됩니다.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그러합니다. 구성원이 나태하거나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이어서도 아닙니다. 조직구조에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해답은 리더가 풀 수 있습니다. 구조가 지탱되는 이유는 권력의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관중석에 앉아서 야구를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