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무던한 일상은 지켜져야 한다
사람들의 무던한 일상은 지켜져야 한다
  • 강원남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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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현관 입구에 신발장을 살펴보니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로 첫발을 내딛었던 2007년, 취업을 축하한다고 매형이 사주셨던 구두 한 켤레.

당시에는 행사 있는 날에만, 좋은 날에만 아껴 신는 A급 구두였는데, 어느 새 신다보니 발에 익숙해져, 결국엔 행사 없는 날에도 부지런히 나와 함께 일상의 사회복지현장을 누벼주었던 친구가 되었다. 꽤 괜찮은 메이커 여서였을까. 밑창도 헤지고 군데군데 낡고 빛이 바랬으며, 굽도 몇 번을 갈았지만, 여전히 그래도 튼튼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럴 듯 한 매무새를 보여야 하는, 남들 이목을 신경써야 하는 결혼식이나 좋은 날에는 비록 함께 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혼자 돌아다닐 땐 든든히 내 발을 편안히 감싸주는 그런 친구이다.

이후 새로운 구두를 여러 켤레 구입을 했지만, 그래서 이제는 버려도 되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에, 버리지 못하고 신발장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아쉬움에 조금만 더 같이 가자고,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말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무던한 것들이 오랜 세월을 버텨낸다.
멋지고 화려하고 비싼 것들은 아끼며 조심조심 애지중지 다루다 보니 조금이라도 망가지거나, 잃어버리게 될 땐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하며 속상해 한다. 그러다가 더 좋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면 이내 언제그랬냐는 듯 시들해져 곧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낡고 평범한 무던한 것들은 망가지면 그만이고 언제든 새로 사도 된다는 식으로 가볍고 편하게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군데 군데 흠집도 잡히고 덜걱 거러긴 해도 오랜 세월 그 역할을 다하며 무던히 곁에서 함께 있어주곤 한다. 찌그러지고 그을렸지만 라면 한 끼를 끓여 담아내는 냄비, 군데군데 이빨을 보이는 싸구려 접시, 털이 듬성듬성 빠져있는 빗자루 같은 것들. 돌아보면 그 무던한 것들이 나의 일상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내가 근무했던 노인복지관은 어르신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민원을 자주 제기하시는 어르신들이 주장하고 요구하시는 대로 사업들이 바뀌기도 하니 으레 그 분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급자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강 선생, 민원을 넣는 어르신들도 중요하지만, 민원 없이 조용조용히 묵묵히 복지관을 이용해주시는 어르신들의 말씀에도 마음 내어 귀를 기울여야 돼. 표출된 욕구도 중요하지만, 잠재된 욕구를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 그 분들이 정말 감사한 분들이야.”

그제서야 복지관 개관 때부터 십수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키시며 자원봉사를 하셨던 어르신, 아침마다 프로그램실을 쓸고 닦으셨던 어르신, 직원들에게 항상 밝은 미소로 격려를 해주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던한 어르신들의 애정과 배려가 복지관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하시는 많은 이야기 중 하나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루지 못한 꿈들과 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평범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아침에 일어나 내 발로 화장실로 걸어가 세수하고 양치하고, 내 손으로 밥을 먹고,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과 함께 TV를 시청하던 평범했지만 반복됐던 일상이 그립다고 하셨다. 지루했던 일상 곳곳이 곧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셨다. 무던한 일상이 우리의 삶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이처럼 수많은 무던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살아내고 있다. 빈 병을 채우기 위해선 자갈도 필요하지만, 자갈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모래가 필요하다. 모래가 가득 채워져야 병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견고해진다. 무던한 것들이 무너지면 삶이, 그리고 사회가 흔들린다. 그래서 무던한 삶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은 훌륭한 정치인들과 대기업 재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던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던한 삶들의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던한 삶을 살기도 어렵고, 무던히 죽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는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죽음의 순간을 유보하기 위해 연명의료장치에 연결되어 홀로 쓸쓸히 삶을 마감한다. 매일 매일 28명의 사람들이 삶의 끄트머리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힘겨운 생을 마친다. 반지하 원룸, 쪽방촌, 고시원에서는 모두에게 잊혀진 이들이 죽어서 조차 발견되지 못한 채 썩는 것도 허락이 되지 않아 부패되어 발견된다. 그리고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따스한 봄날, 300여명의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다 차마 그 꽃을 다 피워내지 못한 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해야 했고, 산업 현장에서는 이름 모를 수 많은 계약직, 하청직 노동자들이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톱니바퀴에 끼인 채 발견조차 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무던한 삶이 무너지니 무던한 죽음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 무던히 살다가 아무 일 없이 무던히 삶을 마감하는 것은 동화 속 에서나 볼법한 그런 일들이 되어 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생사학(生死學) 곧 죽음학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자연사(自然死)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못하고, 죽음 조차도 자연스럽게 맞이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무던한 일상은 지켜져야 한다.

무던한 삶이 지켜져야 그 끝에 다다라 무던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사람들의 행복한 죽음을 도와주는 사람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행복한 삶이 먼저 우선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하기에 사회복지사로 그들이 무던히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소명이 있다.

사람들이 하늘에서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온전히 다 누리고 눈감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록 낡고 다 헤어지고 오래되었지만 무던히 내 삶을 함께 해줬던 구두 한 켤레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