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디지털 복지 디스토피아’의 그림자
다가오는 ‘디지털 복지 디스토피아’의 그림자
  •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 승인 2019.11.11 19: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어지는 가난, 반복되는 비극 성북 네 모녀 사건
정보 수집으로 공적 지원 받은 사람은 100명 중 1명에 불과

성북 네 모녀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숨지기 전 2~3개월간 월세를 체납했고, 가스요금 등 공과금도 연체되어 있었다. 우편함에 수북이 쌓인 각종 채무와 금융연체에 관한 통지서는 생전 이들의 빈곤 상황에 대해 짐작케 했다. 가난 때문에 또 한 가족이 세상을 등졌다.

지난여름 관악구에서 모자가 아사했고, 강서구에서는 부양의무자에 의한 가족 살해가 일어났다. 비극은 반복되고 가난은 깊어지는데, 빈곤을 해결하겠다는 공허한 선언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정보 수집으로 공적 지원 받은 사람은 100명 중 1명에 불과

성북구 네 모녀의 죽음 이후 정부는 왜 이들의 죽음이 발견되지 않았는지 설명하기 급급했다. 복지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시스템이 왜 이들을 복지 대상자로 발굴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변명이다. 예를 들면 해당 시스템은 2개월 이상 가스비 체납, 건강보험료 6개월 이상 체납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알리지만 이들 모녀는 사망 당시 이 기준에 살짝 미달했다는 식이다. 이런 설명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8월 관악구 모자의 아사사건 당시에는 월세와 가스비를 체납하고 있었지만 ‘재개발 임대아파트’여서 해당 정보가 수합되지 않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2017년 2월 관악산에서 숨진 50대 남성은 7개월간의 실직과 월세, 공과금 체납이 있었지만 65세 미만이라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정부의 변명은 더 자세하고 새로운 빈곤층의 정보를 수집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송파 세 모녀의 죽음 이후 ‘사회보장급여의 이용 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 법률에 따라 각종 공과금의 체납 및 신용과 부채에 관한 정보가 빅데이터로 수합된다. 때때로 법을 개정해 사각지대 해소를 핑계로 정보수집의 권한을 넓혀왔다. 이러한 정보수합은 과연 효과적인가? 2015년 12월부터 2016년 6월 사이 보건복지부가 빅데이터를 이용해 발견한 사람은 21만 명에 이르지만 실제 공적 지원을 한 사람은 3천 44명, 1.64%에 불과하다.

낮은 지원율의 이유는 자명하다. 생활고를 인지하더라도 실제 지원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부양의무자 기준 등 까다로운 선정 기준은 그대로 둔 채 빈곤층의 개인정보만 수합되는 중이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수집된 개인정보가 어떻게 잘못 사용될지 우리는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누구나 가난에 빠질 수 있다

이들 모녀는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세 100만 원을 내고 살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 급여는 생계급여 142만 원, 주거급여 41만 원. 월세 백만 원을 내고 나면 83만 원으로 네 가족이 한 달을 살아야 한다. 이들이 빈곤에 빠지기 전, 일상적인 소득과 소비생활을 할 때와 복지제도 사이의 간극은 너무 크다. 이런 간극이 어쩌면 복지신청을 주저하게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사업자의 수급 신청을 매우 까다롭게 심사한다. 당장 소득이 중단되었다 할지라도 이를 신뢰할 수 없다며 수급 신청을 거절하는 것은 전국 곳곳 동주민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설사 신청했다 할지라도, 폐업신고가 되지 않은 네 모녀의 쇼핑몰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 자영업자가 육백만 명에 이르고 이들 중 36%가 2년 만에 폐업하는 나라에서 성북 네 모녀가 겪은 일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가난에 빠질 수 있고, 가난에 빠지더라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사는 최소한의 이유가 아닌가.

답답한 것은 빈곤을 겪는 사람마다 그 과정과 모습이 다른 반면 제도는 몇 가지 전형적인 상황만을 ‘보호받을만한 빈곤’으로 대접한다는 점이다. ‘애매하게 가난한 것은 도움이 안 되는(복지 신청도 안 되는)’(웹툰 여중생A 발췌) 상황이 불안정 저소득 노동자, 개인사업자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이 최종적인 빈곤에 빠지기 전까지 복지제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 물기라도 꼭 쥐어짜듯 빡빡한 기준으로 가득 찬 복지제도는 빈곤에 빠진 사람들을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누구나 가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필요한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듯이다. 젊으니까, 아픈 곳도 없어 보이는데 왜 복지에 기대려고 하냐는 사회와 정책의 시선이 빈곤의 나락에 떨어진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빈곤을 만드는 구조, 빈곤을 해결하지 않는 권력

‘염전 노예사건’이 알려진 후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가혹한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 있냐며 분노했다. 그러나 이렇게 염전에서 나온 사람들 중 일부가 다시 염전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무급의 노동착취, 가혹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엄연한 폭력으로 보이지만, 그곳을 빠져나온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빈곤은 폭력으로 보이지도, 공분을 불러오지도 않았다.

우리는 왜 누군가는 꼭 가난해지는 세상에 더 분노하지 않는가. 성북 네 모녀를 발굴하지 못한 전자 시스템이 아니라, 각자의 방 안에 빈곤을 숨겨야 하는 세상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가난에 빠졌을 때 국가와 사회가 나의 존엄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조차 없다면 우리가 왜 이 사회를 지탱해야 하는 것이냐고 되물어야 한다.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이 3년 차인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반빈곤운동 단체들은 지난 10월 17일부터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위한 청와대 농성에 돌입했다. 지난 10월, 유엔에 채택된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서’에는 ‘디지털 복지국가’가 ‘디지털 복지 디스토피아’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빈곤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명확한 대책은 방치한 채 데이터 수집에만 골몰하는 한국의 현실이 디스토피아의 조짐은 아닐까.

이 기고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