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별한 형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벽하지 않다
[나의 특별한 형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벽하지 않다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1.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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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형제 (Inseparable Bros , 2018).  
감독_육상효, 출연_신하균, 이광수, 이솜, 박철민 외.
한국 | 드라마 외 | 2019.05.01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114분.

<나의 특별한 형제>. 사실 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이 들었던 영화이다. 

‘장애인 관련 영화’라는 것이, 즉 ‘장애를 특별함’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올드한 제목인 데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이나 관계만 보아도 뻔한 이야기에, 상투적인 전개가 짐작되는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관람 만큼은 편식이 심한 내게 이 영화는 그다지 끌리는 영화가 아니었다. 그런데 대중이 준 높은 평점에 놀라, 보게 된 육상효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방가 방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지만 <방가 방가>는 화재성도 있었고, 방송에서 자주 해줘 봤던 기억이 있다. 이주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이들이 겪는 시선과 차별의 문제를 다뤄 무거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코미디로 이야기를 풀어냈던 영화였다. 희화화와 해학 사이의 애매모호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진정성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가 풀어내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과 모습은 어떨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나의 특별한 형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벽하지 않다’ 라는 문장으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약한 사람들은 같이 살아야 한다. 같이 살 수 있어서 사실은 강하다."

경추3번을 다쳐 지체 장애를 가지게 된 ‘강세하’, 지적장애라고는 하지만 중복장애에 가까워 보이는 ‘박동구’. 주인공들의 면면들부터 통상적인 관점의 완벽함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오랜 세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가족보다 더 두텁고 단단한 관계가 되어 살아왔다. 

둘의 모습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며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재밌고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인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이를 채워주고 보완해주는 상대를 만나 비로써 완벽해지는 관계에서 나오는 힘이랄까? 이것은 이 영화가 전하려는 ‘약한 사람들은 같이 살아야 한다. 같이 살 수 있어서 사실은 강하다.’ 즉 ‘연대의 힘’이라는 메시지를 관통하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내가 동구를 이용했다면, 동구도 나를 이용한 겁니다. 동구가 나를 도왔다면 나도 동구를 도운 겁니다. 그렇게 우린 같이 사는 거라면….”

동구의 성년후견인 지정을 위한 재판이 진행되는 중 동구 엄마 쪽 변호사 세하에게 “동구를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세하의 절규에 가까운 답변이었다. 이처럼 평소 투덜거리는 것 같지만 말 속에 뼈가 있는 세하의 말들 속에는 장애인의 편견과 차별들은 물론이고, 이들이 그동안 겪은 아픔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동구가족들에게 쏟아놓는 말들과, 동구의 성년후견인 재판 과정에서 한 말들은 치유되기 어려운 버림받은 상처와 늘 장애로 인해 짊어졌어야 했던 사회의 냉대와 무시, 혐오들이 읽혀지는 대사들이었다.    

이 영화는 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떨어져선 절대로 살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가 만들어낸 힘이 어떤 것인지를 일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화장실 신에서 뿐만이 아니라, 은행 업무를 보는 신에서도, 수영대회 참가 신청을 하는 신, 밥을 먹을 때나, 잠자리와 잠든 사이까지도 이 둘의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 스며있음을 보여준다. 매 장면들에서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당당하게 말하고 동구의 눈높이로 설명해주는 ‘세하’의 모습, 세하의 속사포 요구사항을 거의 감각적으로 알아듣고 미션을 수행하듯 즐겁게 해낸 후 성취감에 씩 한번 웃는 동구의 모습 등은 웃음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고정관념화 된 장애인의 잘못된 인식들을 꼬집어 준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았으면 하는 장면들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나누는 대화와 행동이 있다. 

동구가 길을 잃었을 때 어떤 감정이어야 하고,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반복해주며 물 내리라는 말도 잊지 않는 세하, 세하에게 어떤 것들이 필요하고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를 몸에 밴 것처럼 척척 알아서 해주는 동구의 모습, 또 어떤 상황에서든 늘 동구의 눈높이로 자세히 설명해 주는 세하와, 잠들 때 시계를 맞춰놓고 시간마다 잠든 세하의 자세를 바꿔주는 동구의 모습들이다. 이것은 의무감이나 습관만으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들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만이라도 세하나 동구와 같은 장애인에게는 어떤 지원들이 필요로 하고, 어떻게 소통하며 이 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이는 많은 장애인들이 원하는 삶이고, 사는 방식이며, 그럴 권리가 있음도 기억해줬으면 싶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세하가 동구를 이용하고 지배한다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고 상호보완적일 때 오래 가고 단단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도 가자~!!”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 있고 좋았던 장면을 꼽는다면, 자립해 둘만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동구엄마에게 음식과 보약보따리를 받아든 두 사람. 세하가 동구에게 “우리도 가자.” 말하며 세하가 입으로 전동휠체어를 조작해 나아간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동구가 투샷으로 잡힌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진정으로 둘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투샷이 ‘왜 이들에게는 이리도 어려웠을까? 만감이 교차했던 장면이었다. 이 장면 뒤로, 동구가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집안 곳곳을 보여주는 장면이 이어지고 책장을 넘겨주는 자동기계를 이용해 책을 읽고 있는 세하의 모습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얼굴이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동구는 더 이상 세하의 휠체어를 밀어주지 않아도 되고, 책장을 넘겨주지 않아도 된다. 허전은 하겠지만 자신들만의 공간을 깨끗이 치우고 관리하는 새로운 일이 생겼고, 라면의 유혹은 여전히 참기 힘들어 앞으로도 세하보다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가겠지만, 이 둘은 그렇게 서로 인정하며 자유롭고 평온한 삶을 살아갈 것임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안도감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이 시퀀스에서 동구 부모님이 음식보따리를 집안까지 가져다주지 않고 아파트 입구에 내려놓고만 가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부모라도 둘만의 공간을 존중하고 프라이버시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 같아 그 어느 장면보다도 좋았다. 이 모든 자유와 존중, 평화의 배경에는 전동 휠체어와 책장 넘겨주는 자동기계 등 첨단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기계들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지만, 자립이 가진 힘이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자유가 보장된 내 공간이 주는 삶의 의지와 용기는 장애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세하와 동구의 변화된 표정이나 모습에서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장애인만 이런가? 아닐 것이다. 누구든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취향대로 원하는 삶을 꾸려가고 싶은 욕구가 있고, 이 욕구가 존중받고 실현됐을 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지와 용기가 절로 샘솟지 않나? 이렇게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흥분과 설레임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투쟁과 쟁취의 무서운 단어로 얻어내야만 하는 전리품이 된 현실이 순간 오버랩 되며 답답했다.

이 외에도 위급 상황에서 세하가 아이폰의 시리 기능을 이용해 미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이용방법부터 장애인 특히 중증장애인에게 이런 기능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는데, 이전 장면에서 세하가 질식사 할 뻔했던 장면과 계속 오버랩 되며 중증장애인의 자립에서 활동지원사는 정말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질식사의 원인 제공은 이 기능의 문제점에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사람이 옆에 없어서 위험한 상황까지 간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이점을 주목해 중증장애인에게 활동지원사 제도는 생명과 직결 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그래서 활동지원 제도는 장애인에게는 생명권이라고 인식하는 감수성을 가지고 봐줬으면 좋겠다.

관객이 제3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며 자신의 인식과 모습을 비춰 보게 되는 에피소드들

시설에서 세하를 담당하는 공익요원은 세하에게 진심 없이 건성 건성 의무감으로만 대하는 듯 보인다. 심지어 귀찮음과 무시가 배어 있는 태도도 감지된다. 이 모습은 실제로 시설에 활동지원사로 배치되는 공익 요원들의 모습과도 일정정도 상충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또, 여동생이 성인인 동구에게 묻지도 않고 뽀로로 인형을 선물 한다. 엄마, 아빠는 5살 아이 대하듯 보호만 하려고 하고, 엄마 측 변호사는 동구가 판단력이 미숙해 세하에게 이용당하고 지배받고 있다고 동구의 결정을 존중할 수 없다고 한다. 지적장애나 말이 좀 어눌하고 행동도 다르고 느린 장애인들을 어린애 대하듯 하는 우리네 모습과 너무 닮아 있지 않는가? 

이 장면들을 부연해주는 전후장면들이 있다. 엄마가 세하에게 동구를 이용한다고 몰아세우자, “형한테 그러지 마세요.” 라며 막아서는 장면이라던가, 동생이 선물한 뽀로로 인형에는 시큰둥하면서 수영강사였던 미현의 요거트 선물은 좋아하는 모습, 그리고 미현과 세하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엄마를 선택한 동구의 속 깊은 마음을 보면서 관객들은 동구에 대한 생각과 다른 소통방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현을 비롯한 판사나 복지공무원의 대사와 태도에서도 5살 아이와 성인인 동구의 정신연령은 같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함을 정확히 인식시키고 있다.    

 

‘때론 정확한 사실을 공격적인 화법으로 전하는 화끈함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동구 엄마는 법정에서 “동구를 왜 버리셨어요?”라는 질문에 “동구 아빠가 죽은 후 생활고로 막막했고, 같이 있다간 내가 죽을 것 같았어요.”라고 말한다. 

이 죄의식을 평생 안고 살아오다 동구의 소식을 듣고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이를 버리고 편하게 사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것이고, 데려와야겠다는 엄마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 동감도 됐다. 아마 나보다는 관객들이 더 깊이 공감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버린 것은 분명히 범죄이다. 이 범죄를 유도한 것, 즉 부모가 아이를 지켜낼 수 없게 한 사회의 인식과 법, 제도, 정책 부재의 문제는 짚어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동구엄마가 동구를 왜 버렸는지에만 집중하며 감정에 호소하는 화법은 자칫,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유기와 방임, 학대, 살인 등의 문제의식을 둔감하게 만들고, 장애를 가진 아이의 권리와 상처보다는 부모의 권리와 입장만을 옹호하는 정서에 동조자를 만들어 주는 역할에만 머물 수 있다.

조금은 맥락이 다를 수 있지만, 은행 직원이 장애 특성의 무지를 드러내는 장면을 너무 코미디로만 가볍게 다뤄 뭐가 문제인지인지 인식하기 어렵게 한다거나, 헤어졌던 세하와 동구의 극적인 재회장면과 세하에게 동구만이 해줄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 동구가 세하의 전동 휠체어를 미는 불가능한 장면도 어김없이 나온다. 

전동휠체어는 남성 4명이 밀어도 조금 움직일까 말까 한다. 매번 지적도 해보지만, 고쳐지지 않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 전동휠체어의 잘못된 정보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위험하고, 무엇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은 의존적일 거라는 편견이 내재된 극적 전개에서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 대상화가 되는 것에 우려와 불쾌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본질은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무지, 무시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여주는가는 감독의 인식과 능력이다. 이 영화는 때론 통속적으로, 때론 코믹함으로, 가볍게 보여주거나 감성을 건드려주는 방식으로, 대중이 최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는 선에서 풀어낸다. 

그러나 대중을 의식해 분명히 했어야 하는 이야기와 꼭 짚어주어야 했던 행동들을 그냥 웃어넘기고 울어버리게 하는 감성에만 기댄다면 장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의 악순환은 계속 될 수밖에 없고 오해와 오류들은 의도와는 달리 쌓여만 가고, 단단하게 굳어질 뿐이다. 

상업영화에서 대중을 의식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장애인도 대중의 한사람이고 이 영화의 중심이라는 것을 염두 해 줬으면 싶었고, 어떤 대목에서는 정확한 사실을 공격적인 화법으로 기존의 잘못된 인식을 채찍질할 때 훨씬 통쾌하고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동구’

장애인이나 장애를 다루는 영화는 대상 장애에 대한 설정과 표현이 정확해야한다. 이는 기본 중에 기본이며 특히 이 영화처럼 상업영화인 경우엔 많은 사람들이 접하기 쉽기 때문에, 장애인식과 장애인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동구는 복지 공무원이 말했듯 지적장애인이다. 그러나 동구의 행동이나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은 자폐성 장애인에 가깝고, 얼굴 표정이나 움직임만을 놓고 보면 뇌성마비 장애와 틱 장애도 가지고 있는 중복장애인이다. 이것은 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설정의 문제로 보인다. 

물론 여러 장애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고, 보편적으로 자폐성 장애가 있는 경우 지적장애를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엄밀히 말해 이 두 장애는 혼동하기 쉽고 의학적으로나 오랜 시간 함께 지내 온 활동가들이나 인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하게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중복장애를 지적장애로만 규정해 놓고 장애 표현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장애를 가진 변신 로봇인 것처럼 활용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도 장애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말이다. 

예를 들어 세하가 동구에게 바보라는 핀잔을 했을 때나 수영대회 시작 직전, 세하가 없음을 확인하고 불안해하며 보이는 자해행동은 자폐성 장애의 특성이지 지적장애의 특성이 아니다. 그리고 복지사가 또 엄마가 멈추라고 하면 금세 멈추는 모습은 자폐성 장애의 특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자폐성 장애의 자해행동은 누가 멈추라고 해서 쉽게 멈춰지는 갓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트장면과 수영장면만 보더라도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그저 관객의 눈물샘과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연출로 활용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나 캐릭터에서 나타나는 의식적 감수성에 비춰봤을 때 의도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선 장애와 장애인의 관계, 즉 장애인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묘사들이라 심각한 문제이고, 그 여파는 장애인이나 장애문제처럼 사회적으로 관심도 없고 인식도 약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 지는 이미지들이 전부일 수 있고 유일한 정보일 수 있는 대중들에게, 장애인을 인식하고 대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위험하고 좀 더 책임감을 요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동구는 이 두 장애 외에도 뇌성마비와 틱 장애를 복합적으로 가진 것으로 보여 각각의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우려가 되는 것이다. 이 우려의 기조에는 사람 이전에 장애인으로 인식하고 대하는, 그래서 성인 장애인도 일단 어린애 대하듯 낮춰 대하는 우리네 잘못된 정서에서 찾을 수 있다.    

 

‘장애인 시설과 관련한 행정이 정말 이렇게 비인권적이고 비상식적인가?’

세하, 동구, 그리고 20년을 함께 지낸 친구들, 이들의 보금자리인 ‘책임의 집’은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기부금이 끊기고, 지원금도 끊겨 결국 시설폐쇄 조치가 내려진다. 세하를 비롯해 ‘책임의 집’ 사람들은 함께 살기를 원하며 재밌게 잘 사는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바로 시설분리 조치가 이뤄져 예고도 없이 남성 몇 명이 들어와 자립을 신청한 세하와 동구만 제외하고 마치 인신매매나 범죄자들처럼 모두 봉고 차 한 대에 태워 데려간다. 

시설분리 조치 과정이 너무 간단하고 비인권적이며 비상식적이다. 부모가 와보지도, 자식을 만나 의사도 묻지 않고 동의서에 서명만 하면, 성인이라도 그 동의서 한 장만으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시설로 보내진다. 그야 말로 인간의 권리는 고려되지 않고 철저하게 행정의 편리성에 입각한 행정이 정말 이 나라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실제로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겪는 일이라면 충격적이고, 장애인 단체들이 들고 일어날 일이다.

분명 절차가 있고 조사와 면접 과정에 참여하는 활동하는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과정들은 무시된 채 결과만을, 그것도 70년대, 80년대나 있을 법한 장면들로 자극적으로만 연출한다. 극적으로 이들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해주고 싶은 의도는 알겠으나 사실 왜곡이 너무 지나쳐 활동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고, 현실 왜곡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이 문제의 본질을 생각해볼 겨를 주지 않고 이게 진짤까? 아닐거야 하다가 지나가버린다.

이 문제의 본질은 성인이 되더라도 보호라는 명분으로 원치 않는 곳에서 살아야 하고, 세하의 말처럼 “생판 모르는 남들과 살아야 하는 엿 같은 기분을” 수도 없이 겪어야 하는 일상이다. 이 자기결정권이 무시된 삶,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무시된 시설생활을 하는 장애인들의 삶에 있다. 

이것은 차별을 떠나 인권 유린의 문제이며, 감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 이성을 자극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꿰뚫은 서사와 연출이 더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의미 있게 인식될 수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끼리 이렇게 재밌게 살 수 있는데”라는 세하의 말과. 마지막 장면에서 세하와 동구의 밝고 편안하고 여유 있어진 표정에서부터 장애인의 제도나 정책은 만들어져야하고, 지원 방향 또한 자기결정권이 존중된 장애 중심의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때론 엇박자도 내고, 잘 몰라서 헤매기도 하며, 약간 벅차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전하고 있어서 육상효 감독의 또 다른 장애관련 영화가 기다려진다.    

P,S.:

1. 영화 <기생충>으로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2020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자막의 장벽, 장벽도 아니죠. 1cm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기생층>을 제외하고는 이 1cm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해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볼 수 없는 관객들도 있다. 지적장애인이 등장하는 <마더>조차도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베어프리’버전이 지원되지 않는다. 과거보다는 시청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아졌고 다양한 시청매체로 접근해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이라지만, 아직 ‘베어프리’ 버전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극소수이며 ‘베어프리’버전과 동시 개봉하는 영화들도 소수여서 시청각장애인의 영화 관람은 최신 영화 중심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차별이 아직 존재하고, 극장에서 국내 영화의 한글자막 영화는 아직 비장애인 관객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특별한 경우에만 상영하는 차별은 여전하다.      

다행히(당연시 되어야 하는 문제를 ‘다행히’란 단서를 다는 이 아이러니 한 상황) <나의 특별한 형제>는 IPTV는 물론이고, 포털 사이트의 VOD, DVD 등 다양환 매체와 시청환경에서 구매해 볼 수 있다.

2. ‘강세하’, ‘박동구’는 실존인물인 모델이 있긴 하지만, 실제 이름이 아닌 극중 이름이다. 따라서 존칭을 붙이지 않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