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비극, 무연고자가 된 아들과 어머니
모자의 비극, 무연고자가 된 아들과 어머니
  • 나눔과나눔 기자
  • 승인 2020.02.19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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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1월 장례이야기

2020 변화된 것들
2020년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시 공영장례 수행업체가 새롭게 바뀌었고, 한 달의 시간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예년에 비해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입니다. 무연고 사망자 중 기초생활수급자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망자의 연령대와 여성의 비율(1월 무연고 사망자 36명 중 11명)도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 관련 정책 변화로는 무연고 추모의 집에 봉안기간이 기존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었고, 기초생활수급자 장제급여는 소폭 상승했습니다. (기존 75만 원에서 80만원)

(사진 : 한 달 동안 조카와 누나의 무연고 장례를 치른 유가족이 유골함을 받고 있습니다.)
(사진 : 한 달 동안 조카와 누나의 무연고 장례를 치른 유가족이 유골함을 받고 있습니다.)

무연고자가 된 아들, 그리고 어머니

2020년 1월 초 서울시 공영장례 상담업무를 맡고 있는 나눔과나눔은 서울시의 한 지자체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40대 초반의 남성이 사망했고, 연고자 중 어머니가 계시지만 기초생활수급자이고 장애가 있어 시신에 대한 위임여부의 의사를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망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은 터라 더 지체할 수 없었고, 무연고자로 확정하여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어머니 대신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외삼촌에게서 대신 시신위임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77년생으로 지난 11월 말 사망한 ㄱ님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고인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미용실에서 일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고, 그러던 중 한 남성을 만나 교제를 했습니다. 서울 소재 대학 법대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남성을 위해 미용실에서 번 돈으로 뒷바라지를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벌어 놓은 돈을 모두 가지고 사라져 버린 남성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을 혼자 키우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조현병 증세가 심해진 어머니는 일상생활을 하기에 힘들어졌습니다.

조카의 무연고 장례에 참석한 외삼촌은 어렵게 입을 떼었습니다. “무슨 운명인지 참…… 어렵게 성장한 조카가 군대에 갔을 때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조카에게 ‘이젠 네가 힘든 엄마를 잘 모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조현병에 걸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던 누나로 인해 가족들의 사이는 멀어졌고, 성인이 된 조카에게 어머니를 책임지라고 했던 말이 외삼촌에게는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누나를 버리고 너(조카)라도 잘 살라고 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던 아들은 지난 2019년 11월 말 한강에서 스스로 안타까운 선택을 했고, 2020년 1월 초 무연고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1월 말 또 한 번의 무연고 장례에서 외삼촌을 다시 만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조현병과 뇌경색을 앓고 있던 고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례 사흘 후 사망했고, 마찬가지로 무연고자가 되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조카에 이어 누나의 유골함을 든 외삼촌은 장례 내내 무거운 표정이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았던 어머니와 아들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무연고자가 되어 장례를 치르게 된 현실은 참으로 참혹했고, 서울시립승화원 무연고 전용빈소에는 안타까운 탄식만이 무겁게 내려 앉았습니다.

(사진 : 30년만에 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은 여동생이 산골하며 오열하고 있습니다.)
(사진 : 30년만에 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은 여동생이 산골하며 오열하고 있습니다.)

30년 만에 들은 오빠의 소식

1월 중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진행된 ㄴ님의 무연고 장례식에 한 모자(母子)가 참석했습니다. 고인의 여동생과 조카였습니다. 영정사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어릴 적 집안에 불이나 남아 있는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장절차가 진행되고 2층 공영장례 전용빈소에서 장례식이 이어졌습니다.
ㄴ님은 1954년생으로 지난해 12월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장례에 참석한 여동생은 30년 만에 들은 오빠의 소식이 사망소식이었다고 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 아버지는 3대 독자였어요. 오빠를 낳고 아버지가 많이 행복해 하셨다고 해요. 이름도 ‘너 하나밖에 없다’고 한 일(一 )자를 넣을 정도였죠.”

귀하게 태어난 하나뿐인 아들을 보며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험한 세상에서 잘 살아남기를 바라며 엄하게 군대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타고난 성품이 여려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빠가 어릴 적에 참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원해서 군인이 된 건 아니지만 오빠는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하다가 제대 후에 사업을 해서 돈도 잘 벌었어요. 그런데 사업을 하다 보니 잘못 배운 술 때문에 결국은 자기 한 몸도 제대로 못 챙기게 되었어요. 독하지 못했어요. 선한 사람이었죠.”

오빠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30년 사이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다른 가족은 해외로 이민을 갔습니다. 홀로 남은 여동생은 오빠가 혹여나 길거리에서 변을 당했을까봐 걱정이 들었지만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었다고 합니다.
여동생과 함께 장례에 참석한 조카는 생전 만난 적이 없었던 외삼촌을 위해 무연고자를 위한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은 안은 여동생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산골(散骨)이 끝난 유택동산 앞에서 여동생은 한참을 서서 오빠와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미안해요, 잘 가요 오빠.”

(사진 : 자신의 장례를 무연고 장례로 치러달라고 유언한 무연고 사망자의 유가족이 장례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진 : 자신의 장례를 무연고 장례로 치러달라고 유언한 무연고 사망자의 유가족이 장례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유언, 나의 장례를 무연고로……

1월 중순 서울시의 한 장례식장에서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 ㄷ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이 장례는 사망자가 생전에 “자신의 장례를 무연고로 치러 달라.”는 유언에 따라 공영장례로 진행되었습니다.
ㄷ님은 1939년생으로 지난 1월 초 서울시의 한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습니다. ㄷ님은 생전에 일찍 자녀를 잃은 슬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ㄷ님에겐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아들은 30대 초반에, 딸은 30대 후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히 아들은 결혼해서 손자를 낳고 1년 만에 사망하여 ㄷ님이 많은 충격을 받았는데, 이후 몇 년 뒤 딸마저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사셨던 ㄷ님은 손주들이 보고 싶을 때는 지방에 찾아가 만나고 올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배우자를 먼저 보낸 반려자들은 또 다른 가정을 꾸리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서로의 노력으로 ㄷ님과의 관계는 변함없이 돈독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ㄷ님은 자신이 사망한 이후 장례가 항상 걱정이었습니다. 어린 손자, 소녀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고 자신의 장례를 맡길 수 없으니 만날 때마다 “나는 무연고로 갈 테니까 나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ㄷ님은 생전에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말년에는 뇌종양 수술을 하면서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이후 서울에 사는 외손녀가 돌보기도 했지만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옳겨 삶을 마감했습니다.

입관의식에 참석한 며느리는 “어머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고, 손자들도 장례식에서 술을 따라드리며 먼저 떠난 할머니께 마지막 예를 갖추었습니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살았고, 본인 생의 마지막을 항상 걱정했던 ㄷ님은 유언을 통해 남아 있는 자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공영장례를 부탁했고, 제도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 무연고 장례에 참석한 지인들과 자원봉사자들)
(사진 : 무연고 장례에 참석한 지인들과 자원봉사자들)

삶을 나누었던 이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1월 말 ㄹ님의 무연고 장례에 성당에 함께 다녔던 지인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1943년생인 ㄹ님은 지난해 11월 말 거주하시던 곳에서 사망했지만 오래지 않아 발견되었습니다. 생전에 지인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고 있었고, 왕래도 많았기에 일찍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장례에 참석한 분들 중엔 ㄹ님을 대모(代母, Godmother)로 모셨던 대녀(代女)가 계셨습니다. 대녀 분은 자신의 결혼식에도 성당대모로 축하해주셨던 ㄹ님과 매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무연고자가 된 개인적인 사연을 처음 알게 되었다며 많이 놀라고 사망 후 두 달이 지나서야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나눔과나눔이 서울시 공영장례 상담업무를 진행해 오면서 점점 더 많은 연고자, 지인 분들이 무연고 장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일반 장례와 다른 절차와 방식에 처음에는 의구심에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시간적으로 무연고자 확정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점과 장소 측면에서 장례식장이 아닌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장례가 치러지는 점, 그리고 의전업체가 지자체의 공문을 통해 장례를 진행한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장례에 참석하면서 장례를 진행하는 집례자와 자원봉사자 등이 장례에 집중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내 마음이 누그러지고 융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지막에는 공영장례에 대해 꼭 필요한 제도라는 말을 전하기도 합니다.

무연고 사망자 당사자의 인간의 존엄성, 가족과 지인의 ‘애도와 치유’, 공동체의 ‘사회적 애도’라는 ‘공영장례’라는 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아직도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남아있습니다. 일부 지자체 담당자의 성의부족 등으로 지인들이 제대로 된 장례참석 안내를 듣지 못해 장례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거나, 사적인 이윤추구에 반하는 것으로 판단해 공영장례에 비협조적인 장례식장 등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 교육을 확대하여 원활한 협조 체계를 구축하는 데 올 한해도 더욱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이 글은 나눔과나눔 활동을 지지하는 부용구 활동가가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1월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
김종윤, 박해순, 진현주, 박상형, 강굉문, 정택봉, 서종근, 김영재, 최춘자, 이충훈, 박융현, 이일, 이종태, 김영오, 안만국, 박명희, 김종은, 노상길, 박병원, 변명자, 이신자, 이정애, 한복수, 김숙자

1월 무연고 사망자
박일순, 박용서, 김택, 곽성렬, 이상훈, 박명숙, 동성수, 연복례, 서영, 이수문, 장근효, 윤예근

나눔과나눔이 함께 마지막을 동행했던 서른여섯 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
나눔과나눔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외롭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Re’member
나의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순간을 공감하는 것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
(문구출처 : 마리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