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보다 관계를 먼저 생각하다, '언터처블: 1%의 우정'
장애보다 관계를 먼저 생각하다, '언터처블: 1%의 우정'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3.20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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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터처블: 1%의 우정 (Untouchable, 2011)

감독 -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톨레디노.
출연 - 프랑스와 클뤼제, 오마르 사이.
코미디, 드라마 / 프랑스 / 2012. 03. 22. 개본 / 112분 / 12세 이상 관람 가.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당시 이 영화의 관객 수는 172만 명. 비영어권 영화로는 흥행성과 작품성에서 좋은 평가와 결과를 얻은 작품이다. 8년이나 된 영화라서 먼저 간략하게나마 줄거리를 이야기해야 될 것 같다.  

프랑스 상위 1%의 상류층인 필립은 행글라이더 사고로 전신마비의 장애를 가지고 있고, 드리스는 면접시험 탈락 싸인을 3번만 받으면 생활보조금을 받는 복지 제도의 대상자로 생활력도 없는데다, 가정형편도 어렵다. 

필립과 드리스. 이 두 남자의 첫 대면은 간병인을 고용하기 위한 면접 자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필립의 선택으로 드리스는 필립의 간병인으로 취직하게 된다. 드리스는 처음부터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온 것이 아님을 밝힌다. 따라서 간병이나 장애인에 대한 사전 정보나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도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필립은 가장 마음에 들었고 드리스를 뽑은 이유인데….

둘은 티격태격 좌충우돌하지만, 필립은 자신을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는 드리스가 좋았고, 드리스도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해주는 필립이 좋았다. 남성들끼리 통하고 나눌 수 있는 은밀한 이야기들과 욕구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 즉시 “해 보자” 라고 말해주고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 이것 이상 삶의 의욕을 갖게 하는 힘이 또 있을까? 그런데 드리스는 동생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필립과 보냈던 시간만큼 쌓인 우정과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를 알게 된 필립은 아쉽지만, 드리스를 가족의 곁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하고, 둘만의 이별 여행으로 행글라이더를 타고 함께 하늘을 날아오른다.

 

“그와 있으면,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잠시나마 잊게 돼.”

드리스가 가족의 곁으로 돌아간 후 필립에게 면접자들 중 드리스를 선택했던 이유를 묻는 비서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 얼마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극을 만드는 것의 정곡을 찌르고 꼬집는 대사인지. 순간적으로 쾌감이 느껴졌다. 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함축적하고 있는 대사이기도 했다.

드리스는 간병인 취직 첫날 필립에게는 조금은 당혹스럽고 무례한 질문과 행동들을 거침없이 한다. 예를 들면 성적 욕구는 느끼는지, 성감대는 어딘지 등의 질문들을 전신마비 장애인에게 한다. 또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몸에 뜨거운 것을 대보는 식이다. 나 같으면 화를 내거나 당장 그만 두라고 할 법도 한데, 필립은 오히려 맞장구를 쳐주며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던 중, 한 공간에서 각자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편안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필립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골리는 투로 “여자”라며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않은 채 필립에게 건넨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의 필립에게 드리스는 “아 참 손을 못 쓰시지. 깜박했어요.”라고 말한다. 놀림과 조롱의 어투가 아닌 정말 의식하지 못한 어투로 말이다.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필립이 펜팔로 알게 된 여자이고 만나고 싶지만 자신의 장애 때문에 용기를 못 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드리스는 편지봉투 주소를 찾아내 그녀가 사는 동네를 이야기 하면서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필립은 망설인다. 이런 그에게, “그 동네 남자들 여자들을 엄청 팬대요. 당신은 손을 못 쓰니 얼마나 다행이야.”라며 거친 유머를 툭 던지면서 용기를 내보라고 말한다. 순간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눈가는 촉촉해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짐칸에 사람 실긴 싫은데. 짐짝처럼.”

필립의 차는 트렁크 공간과 뒤에 의자를 없애고 휠체어와 함께 차에 탈 수 있도록 개조되어있다. 둘의 첫 외출 장면, 트렁크를 열라는 필립의 제스처에 드리스는 “짐칸에 사람 실긴 싫은데. 짐짝처럼.”이라면서 필립을 안아 운전석 옆자리에 앉히고 휠체어를 트렁크에 실고 출발한다. 필립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필립의 의향을 먼저 묻고 행동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드리스에게 아직 이것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이고,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필립이 뭘 하고 있는지 통하는 사람, 자신을 이렇게 대해주길 바랬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 과정과 예의범절 따위 뭐 그리 중할까? 생략해도 된다.

첫날 밤의 에피소드도 이어지는데, 약의 부작용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필립을 데리고 무조건 밖으로 데리고나가 밤공기를 쏘여주며 담배를 권해 본다. 장애를 가지게 된 후 담배를 권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필립은 당황스러워 하며 망설이다 들이마신 한 모금은 두 모금이 되고, 둘은 남자 대 남자로, 나눌 수 있는 농담들(각자가 생각하는 여성성이나 성감대를 이야기 하며)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낄낄 거리면서 야심한 시간에 거리를 누빈다. 

이 모습에서 드리스는 처음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고, 필립도 교육 정도나 인종, 계층보다는 사람 그 자체가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곱씹게 되며 잔잔한 파장 같은 것이 전해졌다.

그렇다. 세상의 기준으로 잣대로 사람을 보고 대하는 관계들이 얼마나 깊이가 있을 것이며, 얼마나 끈끈하고 오래가겠는가. 또 이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한정적이고 한계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들의 일상 속에 드리워진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차별

이 영화는 장애를 가진 필립과 흑인인 드리스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애인과 흑인에 대한 세상의 인식과 편견, 이로 인한 차별들이 대사들에서나 캐릭터 설정에서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또 8년 전의 상황이 현재의 상황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로 그 당시 프랑스의 장애인과 흑인에 대한 인식은 우리네 인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언터처블>이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당시, 이 영화 주인공인 필립의 기본 설정들 때문에 볼 의미를 찾지 못했다. 재력가인 필립은 전신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24시간 자신을 돌봐주는 여러 명의 간병인들, 물리치료사, 마사지사를 둘 정도로 재력가이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는 별 불편함이 없다. 보편적으로 힘든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많은 장애인들에게는 필립의 이런 일상은 현실성과 공감에서 그리 쉽게 다가 올 것 같지 않았고, 당연히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겪는 현실 속 어려음과 부딪치는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인물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내 짐작대로 자신을 ‘산송장’이라고 하거나 “내 처지를 생각하면 그 친구 출생배경 따위 뭐 중요하겠나.” 등과 같은 대사들은 현실 속 장애인들이 볼 때는 투정정도로밖에 볼 수 없는 공감보다는 반감을 자극할 것만 같았고, 감독의 인식이 의심될 만큼 불편했던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우려스웠던 장면들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재활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물리 치료 장면에서 바지를 벗은 상태로 마사지를 받거나 물리치료를 받는 장면이 불필요 하게 길게 잡히고 자주 나온다. 카메라 앵글은 물론 구도, 편집이 너무 디테일하게 장애에만 초점을 맞춘 장면이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극중 한 인물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하지 않은 무례한 신들이었다.

 

특히 여성 간병인이 이제부터 필립의 대변과 소변은 드리스가 책임지라고 말하며 방법들을 알려주는 장면, 드리스가 놀라며 여태 해 온 사람이 쭉 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정말 VOD를 꺼버리고 싶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극을 위해 각색된 이야기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간병인이지만 아내도 아니고 의료시술 상황에서의 간호사도 아닌 여성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맡기는 일이 일상이라면 어떨까? 순간 필립이 ‘산송장’이란 말을 왜 달고 사는지, 또 면도를 해주는 드리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칼 한 방이면 편히 갈 수도 있겠군.”이라고 읊조리기까지, 필립의 고통과 심정에 저절로 동요된 나를 보며 깜짝 놀랐다.

이 장면은 분명히 분노해야할 장면이었다. 장애인을 무성 취급하며 수치심도 없고 인격권 침해에도 도움받는 입장이니 감수해야 한다는, 아니 이런 문제를 아예 의식을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왜곡된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에, 이런 인식이 장애인이 이용하는 화장실을 남녀 공용으로 만들었고, 돌봄의 대상이이라는 인식을 더욱 공고하게 고착시키는 문제들과도 이어져 있음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고, 분노했어야 한다. 당사자인 나도 이럴진대, 이런 장면에서 대중들은 무엇을 생각할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  

반면에 드리스가 그만 두고 새로 온 간병인에게 필립이 “담배 없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말은 “선생님은 운동도 못하는데, 폐를 생각해서 피우지 마세요.”였다. 역시 라는 표정으로 공허하고 허탈하게 웃어 보이며 방을 나가버리는 필립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필립의 뒷모습을 보는 새 간병인의 모습은, 현실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극을 꼬집는 장면으로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었다. 이런 일상 속 소소한 장면들에서 툭툭 치는 쨉(권투의 공격법)이 오히려 대중들의 공감을 자극할 속 있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도 있으니.

이외에도, 첫 장면, 드리스가 필립을 옆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며 속도감을 즐기는데, 과속으로 걸려 경찰차가 뒤쫓고, 둘은 드리스의 무면허 운전이 걸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걱정과는 달리, 경찰들은 조사도 하지 않고 드리스를 장애인 스토커로 몰며 함부로 대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필립의 실감나는 연기와 드리스의 능청으로 경찰을 속이고 신나게 도망치는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지만, 이 장면에서 만약 드리스가 백인이었다면? “시커먼 인간들은 다 그래”란 혐오가 담긴 언어폭력을 당했을까?, 그리고 다짜고짜로 스토커로 몰리는 인권침해를 당했을까? 등의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장면이다.

특히 흑인이고 가난하다는 것이 교육과 노동 등의 차별로 이어지고, 이런 차별들로 흑인들의 가난이 대물림되고 혐오와 배제, 무시가 당연시 되는 사회 구조가, 필립을 만나기 전까지의 드리스의 일상과 그의 가족의 일상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진다.

드리스와 그 가족의 고달픈 일상은 프랑스의 흑인에 대한 인식과 흑인의 사회적 위치도 짐작해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드리스가 왜 삶의 목표도 의지도 없이 백수생활을 선택했어야만 했는지, 왜 그리도 국가에서 주는 생활 보조금을 타기 위해 전전긍긍해야만 했는지 등이 자연스럽게 이해 됐고, 장애인의 현실과도 겹쳐졌다.

이 영화에는 레즈비언도 등장한다. 당당하고 주위의 시선을 끄는 멋진 여성으로 등장한다. 필립의 비서로써 전문가적인 캐리어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선입견 없이 대해주고, 전혀 껄끄러움이 없다. 칠립까지도 말이다. 10년 전은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섣불리 시도도 못하는 전문직 레즈비언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키는 것이 반가웠고, 극적으로 레즈비언임이 밝혀지는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 배경에는 아무래도 우리나라보다 성에 관해서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프랑스의 사고와 정서가, 그리고 백인인 여성이었다는 점 등이 의식적이었던 무의식적이었던 관계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그 사회의 현실을 일정정도는 반영한다. 이 영화가 비추는 프랑스의 성소수자를 제외하고는 장애인과 흑인은 물론이고 각각의 다른 소수자들의 인식은 우리나라, 아니 세상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것 같다. 인권 선진국의 영화든 후진국의 영화든 장애인과 다른 인종. 대부분의 소수자들의 스테레오 타입과 현실에서 부딪치는 장벽들은 거기에서 거기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대하는 당사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어떻게 설정하고, 어떤 방향으로 전달해주는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을뿐.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필립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더 변화시키고 인격권이나 사생활 침해로부터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저 수용하고 회피하는 태도다. 반면 드리스는 자신의 신념과 진심을 행동에 옮기는 능동적인 사람, 기분 나쁘면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라 그가 처한 상황을, 그가 당하는 모욕과 혐오, 차별들에 대중을 츙분히 공감시키고 문제를 의식시키는 일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장애인보다는 흑인의 인식변화에 좀 더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실망스러웠던 것은 이 영화에 담긴 프랑스의 흑인에 대한 인식이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계급 타파를 외치며 혁명을 주도했던 프랑스에서도 아직까지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흑인에, 그리고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드리워진 세상의 편견과 차별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 착잡했다.    

 

P.S. :

1, 사람은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왜 대중들은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라고 인식할까?

<언터처블 : 1%의 우정>은 남자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편견 없이 진심으로 대하는 것,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것, 그리고 진심이 전해지는 위로와 지지, 응원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는 관계 속의 사람 이야기다.  지극히 상식이고 보편적인 가치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의 리뷰를 보다보면, ‘무겁고 어두운 소재지만 …’이라는 단서들을 붙이며 시작하는 글들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관련한 영화의 리뷰들, 전문 비평가나 블로거들의 리뷰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저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쓰는 것이라면 그 평론 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또한 이 정도로, 우리의 의식 저편에 아주 깊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일까?, 이는 대부분의 사회적소수자를 다루는 콘텐츠들에서도 즐겨 쓰여 지는 문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등 생각이 많아진다.

이 영화의 소재나 이야기가 어둡고 무겁게 느껴지셨다면, 장애인이나 흑인 등 세상의 잣대, 기준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수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덧씌운 ‘색안경’을 벗고 다시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2. 이 영화 역시 시청각 장애인의 볼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있다. 영상문화향유는 그들만의 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하는 평등권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영상물의 ‘베러어 프리’ 버전이 지원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