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의 거대한 참나무를 베지 마세요
클라이언트의 거대한 참나무를 베지 마세요
  • 이혜주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4.19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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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아래 사진을 잘 살펴봐 주세요.

어떠신가요. 갑자기 무엇인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셨나요?

사진 속 아이는 모든 저작권이 저에게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제 아들입니다.
아들이 1학년 일 때, 마루에서 놀던 모습입니다. 사진을 보신 분이라면 분명 저와 같은 마음이 생기셨을 거예요. 바로 엉덩이 사이에 끼어있는 팬티를 빼주고 싶으실 겁니다.

저는 너무 귀여워서 얼른 사진을 찍어 놓고, 끼어있는 팬티를 빼주었습니다. 그러자 저희 아이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엄마 시원하게 해줘서 고마워” 라고 했을까요?

제 예상과 달리 아이는 자기 노는데 방해했다며 짜증을 냈습니다.
“성훈아, 끼어있는 팬티가 너무 불편해 보였는데, 엄마가 시원하게 해주었잖아” 라고 말했더니 아들 녀석은 “난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 엄마는 괜히 노는데 방해만 하고! ” 화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이의 반응에 섭섭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니 '내가 클라이언트와 만날 때,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만났겠구나' 싶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문제로 표현하지 않았는데 저는 전문가랍시고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 그래서 클라이언트를 사람이 아닌 ‘문제 덩어리’ 로 봤던 것입니다.

엉덩이에 끼인 팬티, 아들은 괜찮았지만 내가 보기엔 매우 불편하게 보여 꼭 내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 문제로 인식했던 것처럼 클라이언트가 표현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모두 문제 상황으로 인식해 저도 모르게 ‘문제종합선물셋트’ 로 그를 바라보았을 겁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질문 할께요.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 때문에, 가족 때문에, 이웃 때문에, 친구 때문에, 공부 때문에, 연애 때문에, 직장 때문에, 내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분 계신가요?

사회복지사 경력 18년 차에 접어드는 저에게는 치명적인 어려움(고민)이 있습니다. 사회복지사 경력과 함께 비례하는 것이 있지요? 바로 운전경력!  제 운전경력도 18년 차에 접어듭니다. 그런데 저는 고속도로 운전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제가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몸과 마음이 매우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일반도로, 국도는 마치 카레이서처럼 씽씽 잘 달립니다. 고속도로에서 크게 사고 나거나, 사고 장면을 목격한 적도 없는데 고속도로 자체가 저에게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저도 제가 이상합니다.

그러면 제가 타 지역으로 출장갈 때는 어떻게 할까요?
저에게는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네비게이션을 무료도로로 설정합니다. 비록 고속도로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일찍 출발하면 되니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기차나 시외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무료도로로 가려 해도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경우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대중교통 시간이 잘 맞지 않거나 여러 번 갈아타야 할 때는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합니다. 셋째, 일일 로드매니저를 구합니다. 대부분 저의 남편이 감당해줍니다.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제가 매우 답답하실 겁니다.

‘아니, 고속도로 운전이 제일 편하지 않나?' 그러나 저는 괜찮습니다. 무려 17년 이상 3가지 방법을 활용하여 잘 견뎌왔으니까요.

클라이언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복지사가 보기에는 모든 상황이 ‘문제' 일지 모르나 당사자는 괜찮을 수 있습니다. 혹, 저처럼 당사자만의 ‘방법' 으로 그 문제를 잘 견디거나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클라이언트가 굳이 문제라고 표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조심스럽게 당사자가 어떻게 해결해 오셨거나 견딜 수 있었는지 그것을 여쭈어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 주시면 됩니다(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장애를 가진 분이거나 가정폭력처럼 강압적인 분위기에 놓여 있는 경우는 해당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희 아들은 여름마다 항상 사진처럼 그 패션으로 집안을 활보합니다. 엉덩이에 끼어있는 저 불편한 팬티를 매일 본다는 것이죠. 한번 혼난 적이 있기에 함부로 빼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참 신기하게도 아이가 화장실을 가거나 마루에서 방으로 걸어갈 때, 엉덩이가 실룩실룩 움직이며 끼어있던 팬티가 저절로 빠집니다. 제가 굳이 빼주지 않아도 제가 문제라 여겼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겁니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 중 '어려운 순간마다' 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저 아이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비록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겨울나무가 안에서 나이테를 키워가듯
긴 호흡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진정한 성공은 시험 성적에 있지 않고 앞선 승부에도 자격증에도 있지 않고
인생 전체를 두고 자신을 찾아가는 성실한 걸음 속에 있음을 알게 하소서

도토리 안에는 거대한 참나무가 들어있듯 자기 안에는 더 큰 자기가
숨 쉬고 있고 자기만의 리듬으로 자신의 때가 오고 있음을
어려운 순간마다 기억하게 하소서

지금의 아픔이 오히려 남과 다른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하나의 이정표라는 걸 잊지 않게 하소서

혹시 지금 내가 만나는 클라이언트가 사람이 아니라 문제 덩어리로 보이시나요? 그래서 클라이언트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해결해 주고 싶으신가요?

함부로 문제로 판단하고 개입하는 순간 클라이언트의 ‘거대한 참나무’ 를 내가 싹둑 베어 버릴 수 있습니다. 빼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빠졌던 팬티처럼, 클라이언트의 문제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거나 희석될 수 있습니다.

잘 견뎌오셨던 방법을 여쭙고 지지하면, 그분만의 리듬으로 그분만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