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능사일까?
‘용서’가 능사일까?
  • 최주환 (대전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 승인 2019.04.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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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다보면 늘어졌던 정신이 화다닥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에 읽은 글이 그런 경우인데, ‘용서’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하면 오히려 화(禍)를 부를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에게 해꼬지를 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가 있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나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몹쓸 짓을 한 사람까지 용서하자고 하는 것은 치명적인 재앙의 단초(端初)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을 이제는 용서할 때가 되었다는 앞뒤 없는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자신의 금쪽같은 아이가 영문도 모르고 수장(水葬)된 부모들에게 이제는 잊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고 협박일 뿐이다.

광주의 5.18도 마찬가지다. 당사자가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모를 일이지만, 제3자가 이해와 용서를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그것은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살해할 수도 있다는 전례를 승인하자고 선동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성경의 권고를 오해해서 ‘제한 없는 용서’를 들먹이는 분들이 있다. 이는 개인의 용서를 아무데나 적용하려는 ‘과잉 일반화’에 불과하고, 개인의 순교(殉敎)와 집단 학살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온 무지의 소산이다.

 최주환 (대전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회장)<br>
 최주환 (대전광역시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실제로 오늘의 정치사회적 왜곡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와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가 도사리고 있다. 다 끌어다가 죽였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친일의 대가로 받은 부귀와 영화는 끝장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용서를 해도 했어야 하는데, 무작정 용서부터 해 놓고 보니 결국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은 진상의 규명도 되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문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304명의 젊은 청춘이 죽은 사건을 용서라는 말로 포장해서 얼렁뚱당 넘어가자고 하는 것은 피해당사자들에게는 정신적 테러에 다름 아니다.

용서가 능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