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어려움 겪는 문화예술, '배리어 프리'로 뛰어넘어 볼까
코로나19로 어려움 겪는 문화예술, '배리어 프리'로 뛰어넘어 볼까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5.07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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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 11조 1항에는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며 문화적 권리가 헌법적 권리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UN장애인권리협약 제 30조에서도 ‘당사국은 장애인의 창조적, 예술적, 지적 잠재력을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장애인의 문화적 권리 보장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문화예술 전시 및 공연’의 문턱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독 높았다. 

시각,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작품 자체를 볼 수 없는, 문화향유 자체를 배제 당하는 차별로 인해, 또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보행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공연장이나 전시관의 접근성은 물론이고, 장애를 가진 관객의 욕구나 동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무대와 좌석 등 구조적인 문제와 미비한 편의시설의 차별로 인해, 관객으로써 존중받지 못했고, 누구나 함께 보고 즐기면서 소통하는 수단으로써의 문화를 자유롭게 공유할 수도 없었다.  

조성진이 무관중 유튜브 라이브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조성진이 무관중 유튜브 라이브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물리적 거리두기'가 생활화 되면서 온라인의 다양한 플렛폼을 활용해 내 거실, 내 방 1열의 VVIP석에서 보고 즐기는 전시회나 예술 공연들이 하나 둘 기획되고 선보여지고 있다.

매체의 융통성과 유연성을 잘 활용한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욕구를 세심히 반영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공연 문화가 공연예술계의 또 하나의 주류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보게 된다. 

벌써 4월 만해도 ‘조성진 무관중 온라인 공연’과 ‘방탄소년단 콘서트’, ‘국립창극단 <패왕별휘>’, 등의 다양하고 굵직한 공연들이 선보였고, 잎으로도 유명 예술가나 가수의 콘서트,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온라인 공연들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중에 특히 지난 4월3일 처음으로 ‘배리어 프리’버전의 공연 실황을 온라인 생중계해 좋은 평가와 새로운 형태의 공연문화로써 가능성을 보여준 탈극 <오셀로와 이아고>공연은 ‘배리어 프리’ 공연의 좋은 모델링이며, 공연문화의 한 축으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 공연이었다. 

그렇다면 ‘배리어 프리(Barrier-Free)’란 무엇일까?

지난 4월 3일 온라인으로 생중계 된 탈극 <오셀로와 아이고>공연의 ‘배리어 프리’ 버전. 

“‘오셀로’의 탈은 두 가지인데, 초반에는 붉은 색의 거친 피부와 머리카락이 달린 탈을 씁니다. 이때 수 십 개의 장갑을 잘라 만든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나옵니다. 후반에는 ‘이아고’의 말에 홀려 탈을 바꾸게 되는데 희번덕이는 눈과 꼬리가 한껏 올라간 입을 가진 광기어린 표정의 탈을 쓰고 나옵니다. 이때는 차가운 푸른색 제복을 입고 나옵니다.”

이 대목은 주인공 ‘오셀로’에 대한 해설 부분이다. 시작장애를 가진 관객들에게 등장인물의 면면을 해설하는 ‘배리어 프리’버전 <오셀로와 이아고>공연의 첫 부분이다. 이 공연의 대사들은 청각장애를 가진 관객들이 들을 수 있도록 수어동시통역으로, 또 장면과 소리, 음향 등은 자막 해설이 지원되고 있었다. 이처럼 비장애 중심의 전시 및 공연, 영화를 보고 듣는데 ‘장벽을 없애는 것’이, 지금까지 문화예술공연계의 '배리어 프리'에 대한 인식이다.

사실 그동안 문화향유의 관점에서 '배리어 프리'의 영역을 비장애 중심의 문화콘텐츠에서 시각, 청각 장애를 가진 관객들의 장애로 인한 장벽을 없애는 것에 무게를 두고 논의해왔고, 인식되어 온 측면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보고 듣는 것을 위주로 기획 제작된 예술무대나 영상작품이 문화에 주류인 현실에서, 이를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서 누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문화향유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와 배제를 당하는 기본권인 평등권 침해의 문제이고 당연히 우선적으로 알리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더불어 인식해야 할 예술 공연 문화에서의 ‘배리어 프리’ 영역은 접근성과 현장의 환경이다.
내가 연극이나 전시작품을 보기 위해 대학로의 소극장이나 인사동의 소규모의 갤러리들을 갈 때마다 부딪치는 것은 출입구의 좁고 가파른 계단들이다. 또한 대학로 소극장의 경우, 아찔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거의 90도 각도로 설계된 객석 구조는 보행에 장애를 가진 나는 사람들이 내 손을 잡아주어야만 내가 예약한 좌석에 앉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극장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환경. 

설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극장 안에 들어간다 해도 개인의 취향이 무시된 장애인 전용석이란 꼬리표가 붙은 맨 앞좌석이나 맨 뒷좌석에서 눈과 고개가 아파도, 잘 보이지 않아도 감수하며 2시간 넘게 앉아서 보고 나와야 한다. 대학로 소극장은 너무 열약한 곳들이 많아서 이마저도 없는 대부분의 극장들에서는 휠체어와 분리되는 것을 감수하며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관객들은 아예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한 연극 프로젝트 팀이 대학로 공연장 120곳을 조사한 결과,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도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은 14곳뿐이었다고 한다. 90%의 공연장이 장애를 가진 관객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문화에서의 '배리어 프리'는 모든 문화 콘텐츠의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누구나 진입할 수 있도록 ‘장벽을 없애자’는 것이며, 이제껏 문화의 평등성과 자유성, 다양성을 억압했던 배제와 분리 등 획일성에 의한 불평등의 요소들을 없애자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배리어 프리’는 문화의 본질이며, 삶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으며, 인류가 기본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랜선 공연, 문화예술 '배리어 프리' 꽃필까?

온라인 공연(랜선 공연)으로 문화예술의 ‘배리어 프리’의 의미와 가능성을 엿본다.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취소 된 공연들이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겨 열리는 다양한 렌선공연들이 시도되는 요즘. 이런 공연 문화의 변화가 그동안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독 높았던  공연문화계의 문턱을 낮추는데 ‘코로나19’가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온라인으로 내 거실, 내 방에서 나의 언어로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나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사회의 인식이나 불평등한 여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공연문화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문화에 장벽 없이 접근할 수 있고 향유의 권리를 누릴 서비스를 제공받을 다양한 활로가 열리는 것이며, 또 이에 그동안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만의 문화로, 그들만이 즐길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오던 콧대 높았던 예술 공연문화계에서, 예술 공연 및 전시 문화의 ‘배리어 프리’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변화들과 새로운 시도들에서 나를 비롯해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은 매우 중요해,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야 모든 문화의 ‘배리어 프리’를 이룰 수 있을까? 또 랜선 공연의 붐이 기회이고 시작이라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실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할 때다. 무엇보다 장애계 문화 쟁이들의 의견을 듣고 모아 문화 전문가들과 지속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소통의 장들이 마련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배리어 프리를 위한 선결과제

현 단계에서 나누고 모아야 할 의견들은 많지만, 내가 생각하는 ‘배리어 프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그 외의 문제들을 짚어본다면, 우선, ‘배리어 프리’의 인식은 부정적이거나 관심이 없어서 무지하거나 극과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과 ‘배리어 프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귀가 안 들리거나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공연을 보고 영화를 봐요?’라고 묻는 경우가 대부분다. 장애의 한계성을 전제한 부정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그나마 관심을 보이고 설명할 수 있으니 다행인 경우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가 공연이나 전시, 영화를 보고 싶으면 가서 보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경우일 것이다. 심지어 ‘나는 보고 들을 수 없으니, 나는 가서 보기 어려우니 나를 위한 전용 길이나 시설, 전용 콘텐츠를 만들어 달라는 것은 오히려 장애가 없는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고 떼를 쓰는 아이 같은 짓’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질문이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문화 향유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권리보다는 동정과 배려의 관점에서 인식되고, 이러다보니 주장이 아닌 호소로 읽혀지는 것이구나 싶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이들이 향유할 수 있는 별도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으로 시혜적인 관점에서 ‘배리어프리’를 인식하는 시선들이 팽배하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곤 한다.

그러나 문화향유뿐 아니라 생활에서의 ‘배리어 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이다. 

문화역역에서의 보편적인 ‘배리어 프리’를 예로 들어보자. 오페라공연장에서 관람할 때 뒷좌석의 관객들이나 배우의 연기와 무대를 좀 더 디테일하게 또 가깝게 보기를 원하는 관객을 위해 오페라 전용 망원경을 구비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좀 더 일상적인 문화인 영화관람만해도 좀 더 입체감을 즐기기 위한 4D관과 입체감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안경을 구비해놓는 것은 기본이며, 모든 외국어 영화에는 한글 자막이나 아이들을 위해 한국어 더빙 버전, 그리고 편히 앉아서 볼 수 있게 보조의자까지 구비해놓고 서비스를 제공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물론 이는 공연이나 영화를 좀 더 편하고 쾌적하게 보면서 감상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하는 권리로써 존중받는 것이 당연시 된 요즘이다. 

그러나 시각이나 청각 장애를 가진 관객을 위한 수어, 자막 버전이나 화면 해설 버전의 공연이나, 영화나 방송의 ‘배리어 프리’ 버전에는 색안경을 쓰고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또한 보편적이다.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사회공헌 프로젝트’나 ‘이벤트성’이 강조돼 이해와 배려의 시선에서 한시적이니 양해하고 봐달라는 시혜성과 호소성이 내포된 특별기획 공연이나 재방되는 방송 작품들 위주로 제작되어 지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아 볼 때마다 걸렸던 것이 있다.
‘이 드라마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방송은 방송통신위원회와 시청자미디어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라는 방송 시작 전 나오는 문구다. 볼 때마다 소화하기 힘들다.

시청자의 다양성과 볼권리를 존중해 이해와 양해를 구하는 것이라면 외국 영화나 다큐의 더빙 버전 방송의 경우에도 시작 전 ‘이 영화의 해당언어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있는 시청자를 위한 한국어 더빙 방송은 저희 방송사와 방송통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라는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문구를 내보내는 것이 맞다. 더빙보다는 자막으로 보기를 원하는 시청자나 더빙도 자막도 없이 보고 싶은 시청자에게는 어찌 됐던 한국어 더빙 버전이 볼권리를 침해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요컨대 ‘배리어 프리’는 문화를 함께 향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권리이므로, 이를 위한 촉구와 요구들은 호소가 아닌 주장으로 읽혀져야 한다. 또한 ‘배리어 프리’는 장애를 가진 이들만을 위해 별도로 제작하는 콘텐츠가 아니라, ‘모든 문화 콘텐츠를 모든 사람이 향유하는데 소외되거나 불편함해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의 문제이다. 변화의 첫 걸음은 이해할 때까지 이야기 하고 인식할 때까지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 당연시 되지 않으니 말해줘야 하고 알려주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첫 번째 과제가 아닐까 한다.  

두 번째 과제는 ‘배리어 프리‘ 문화의 저변 확대이다.

사실 ‘배리어 프리’공연 문화는 온라인공연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프라인공연 즉 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탈극 <오셀로와 아이고>의 ‘배리어프리’공연도 애초에는 오프라인 공연으로 기획된 공연이었다. ‘코로나19’로 온라인 공연이 활성화되면서 ‘배리어 프리’공연도 자연스럽게 그 의미와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활성화와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준 계기가 되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오프라인보다 오히려 접근하기 쉽고 제작하기 쉬울 수 있어서 다양한 시도와 욕구들이 반영된 ’배리어 프리‘ 문화예술콘텐츠둘이 선보일 수 있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공연은 어찌됐던 현장성이 기본인 문화로, 함께 호흡하고 즐기는 현장의 매력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프라인 공연에서 ‘배리어 프리’가 보편화 되고 일상화가 되도록 관심과 피드백으로 동요하면서 문화공연계와 지속적인 소통과 교류가 중요해 보인다.  

나는 보리 포스터
나는 보리 포스터

오프라인 공연정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배리어 프리’ 공연을 선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중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배리어 프리’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는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 극장’에서 선보인 ACC 창제작<우산도둑> 공연과 영화사 ‘진진’이 제작한 영화 <나는 보리>가 최근 제작된 ‘배리어 프리’ 버전의 작품들이다.

특히 영화 <나는 보리>는 5월20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수어’가 일상 언어인 가족의 이야기가 중심이라서 수어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전부 한글자막으로 표기된다고 한다. 이런 시도들이 어린이, 가족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나 영화에서 보편화 되어야 하는 것은, 획일적인 문화에 익숙해지고 친숙해지기 전에 문화의 본질인 다양성, 평등성, 자유성 등을 느낄 수 있고 다른 소통방식의 존중감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최적기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배리어 프리’의 저변 확대에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디즈니’의 작품들과 그 계열사인 ‘마블’, ‘픽사’의 작품들을 ‘배리어 프리’버전으로 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판 ‘배리어프리’버전의 ‘디즈니’작품은 한 편도 없는 것으로 안다. ‘디즈니코리아’의 ‘배리어 프리’에 대한 인식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며, 이에 투자가 필요한 것은 시대적 변화에 맞춘 투자가 가져 올 효과는 기업의 이미지와도 맞물려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로 결국 돌아오기 때문이다.

어린이 대상뿐만이 아니라, 시청각장애를 가진 관객은 물론, 장애가 없는 관객들도 함께 즐기는 오페라 <어둠속의 오페라 라 보엠>을 비롯해 <소리로 보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빛이 된 오페라 마술 피리> 등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이런 시도들은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소리로 보는’, 또는 ‘빛이 된’과 같은 시각장애를 특정 짓는 공연 타이틀은 기획의도가 어떻든 장애를 가진 관객 전용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모두가 함께 즐기기 어려운 공연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해 씁쓸하다.  

이밖에도 오페라 갈라 콘서트에 성우 드라마와 그림자극, 방향이 입혀진 음향효과음, 음악수어 등을 더해 시청각장애를 가진 관객들도 즐기는 <모두를 위한 오페라>도 선보이고 있어 오페라의 ‘배리어 프리’를 통해 오페라의 기존 권위를 탈피하고 개념과 형식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보고 싶은 공연이 되었다.
 
한편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의 ‘배리어 프리’ 공연에서는 해설 및 수어 등을 위해 원작의 각색은 필수적이다. 이 때 곡이나 극본, 시나리오의 저작권이 문제가 돼 무대에 오르지 못하거나 온라인 공연의 경우 업로드 되자마 차단된 미국 사례도 읽은 적이 있다. 이는 ‘배리어 프리’ 공연의 저변 확대와 활성화를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짚어보고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한 온라인 ‘배리어 프리’공연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선에서의 유료화는 무대의 퀄리티와 예술가들의 노력, 감동에 대한 당연한 보상을 위해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시혜적인 인식으로 제작되는 ‘배리어 프리’공연문화에서 탈피해 모두의 공연, 모두가 관객임을 존중 받으며 만족시키는 공연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기 위해서는 ‘배리어 프리’오프라인이나 온라인 공연의 유료화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끝으로, 해외의 ‘배리어 프리’공연의 인식이나 방향성, 환경이 어떠한가에 대한 체험과 조사가 필요하다.

해외의 경우 문화예술계의 ‘배리어 프리’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으로 정착되어 있다. 오프라인 공연장에 소품을 만져 보는 ‘터치 투어’는 기본적으로 마련되어 있고, 영국 국립극장에는 내가 갔을 때만해도 ‘작품소개 점자 안내서나 작품해설 이어폰’이 전부였는데, 요즘은 ‘스마트 안경이 배치되어 있어서 어느 좌석에서든 자막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외국의 장에계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으로 공연무대가 옮겨지면서 공연의 접근성과 다양한 소통방식, 다양한 장애 유형에 맞춘 공연들이 시도되고 만족시키는 공연문화의 활로가 열려 기대감을 갖고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공연 모두 ‘배리어 프리’ 공연문화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고 있다. 해외의 인식과 문화 환경의 많이 다르지만, 우리네 현실에 맞게 도입하고 적용하면 된다. 그리고 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기획단계애서부터 다양한 조건이 있는 관객이 있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문화의 주체로 인식해 제작된다면, 굳이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라는 명칭을 붙여 추가할 필요가 있을까? 더욱이 애초부터 장애를 가진 관객의 존재를 인식하고 만든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공연이나 전시, 영화 제작진들이 깊이 되씹어 봐야 할 지점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배리어 프리’는 문화의 본질이며 온라인(랜선)공연으로 가상현실을 통한 다양한 공연 형태의 진화가 가능한 시대라는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문화 향유를 위한 ‘장벽을 없애는’데는 분명 기회다. 좀 거창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코로나19’가 온라인 공연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하고, ‘배리어 프리’의 의미를 상기시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도록 장애당사자가 주체가 되어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한다면, 인간 중심의 평등과 자유사상이 바탕이 된 문화 부흥기, 즉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성을 존중하는 문화향유의 르네상스가 다시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설레어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