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의 존재감이 빛날 수 있게해주세요"
"클라이언트의 존재감이 빛날 수 있게해주세요"
  • 이혜주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07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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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경기도 안성에서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센터를 이용하시는 할머니 한분이 요즘 들어 병원을 더 자주 가십니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최근엔 목도 돌아가지 않아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녀분들도 힘듭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모시고 가도 의사로부터 듣는 말은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소견뿐이니 답답합니다.
솔직히 이제 100세를 앞두신 어머니가 아픈 곳이 없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게 아닌가 저에게 하소연도 하십니다. 그러던 중 이제 마지막으로 가봐야지 했던 병원의 담당 의사가 할머니께 신신당부를 하셨답니다.

"할머니, 아프지 않으시려면 절대 움직이면 안돼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계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저에게 "의사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던데, 그 양반 말은 나보고 죽으란 건가봐” 하시며 이젠 죽어야지, 그만 살아야지 계속 되뇌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혹시나 다칠까봐, 더 아플까봐 걱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간보호센터 어르신들은 가족들로부터 이 말을 매일 들으십니다.

“밥 안해도 된다니까요”

“청소하다 다치면 어쩌시려구요”

“손빨래는 이제 안하셔도 되요. 세탁기가 있잖아요”

“그러다 병원 가셔야 하니깐 제발 밭일 좀 하지 마세요”

어르신들은 평생 하셨던 것들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까 쓸모없는 사람 같고,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습니다. 걱정하는 말이지만 사람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말입니다.

이렇게 ‘ 아무것도 하실 수 없게 된’ 어르신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선생님들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안전이 보장되는 한에서 어르신들이 무언가 하실 수 있도록 일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른 봄, 밭에 지천으로 널린 냉이를 동네 분들이 캐서 주시면 어르신들께 다듬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가을에는 고추 꼭지를 다듬기도 하고, 내일은 시금치를 다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손수 다듬으신 나물이나 채소들은 당일 조리되어 어르신 식탁에 오릅니다. '어르신들 덕분에 맛있는 반찬 먹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드리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집니다.

이야기꽃도 핍니다. 이 나물은 이렇게 만들면 더 맛있다고 당신만의 비법도 술술 나옵니다. 작은 일이지만 이렇게 어르신들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경험은 특별한 치료, 재활 프로그램보다 더 큰 만족감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은 살아가는데 중요한 힘이 됩니다.
나의 빈자리로 인해 누군가 불편함을 겪게 되면 나의 존재감이 돋보이게 되는 것 같고 솔직히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타인에게 지지받거나 인정받는 상황에서 이런 힘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2015년에 방영된 tvN드라마 ‘응답하라 1988' 5화에서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며칠간 친정에 다녀온 정환이 엄마는 집에 오니 너무나 깔끔한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내가 없어도 우리집 식구들 큰 불편 없었네 하는 생각에 왠지 섭섭해집니다. 엄마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모르는 정환이는 어떻게 하면 엄마를 기분 좋게 할지 고민하는데 정환이 친구가 방법을 알려줍니다. 먼저 아빠는 연탄불을 꺼뜨리고, 형은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데이고, 정환이는 일부러 자기 옷을 찾지 못합니다. 이때 엄마가 나서서 척척 해결하고 동시에 엄마 기분이 좋아집니다. 내가 있어야 집안이 돌아가니 엄마의 존재감이 쑥 올라갑니다.

이혜주 우리동네노인주간보호센터 센터장

저희 아이와 요리할 때가 있습니다.
칼과 불에 다칠까 아이의 안전을 위해 재료를 간단히 다듬거나 조미료 넣는 등의 작은 역할을 부탁합니다. 완성된 음식에 평소 아이가 잘 먹지 않던 채소가 있어도 왠일인지 밥 한그릇 뚝딱입니다. 사실 요리는 제가 거의 다 했지만 작은 역할이라도 참여했던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완성한 음식이 되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가 되는 겁니다.

혹시 우리 현장에서 사례관리를 할 때, 기관의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때 클라이언트는 그저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로 있지 않는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클라이언트를 '가만히 있게' 하여 존재감을 끌어 내리지는 않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실천과정에서 클라이언트의 존재감이 빛날 수 있게 역할을 남겨 주세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내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