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집 논란, 비영리 법인의 목적과 사회의 기대가 본질이다
나눔의 집 논란, 비영리 법인의 목적과 사회의 기대가 본질이다
  • 승근배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25 15: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의(正義)와 부정의(不正義) 사이의 비영리조직 선의(善意)

바야흐로 정의(Justice)의 시대이다. 우리가 정의를 원하는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조국 장관에서부터 정의기억연대까지 우리는 정의를 찾는다. 그러나 정의는 언론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보도만 할 뿐이다. 그러나 언론은 그들 스스로 정의를 내려 버린다. 그리고 대중은 이것을 비판 없이 수용한다.

하지만 정의는 사건 자체에 그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하나의 일면을 보여 줄 뿐이다. 언론은 일면의 시각에서 사건을 기술한다. 이 기사를 대중이 자신이 위치한 일면에서 보게 되면, 일면에 일면만 보게 되는 것임으로 지엽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

법의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법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과정 역시도 완전하지 않다. 법에 의한 판단이 무조건 정의롭다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기사나 판결문만을 가지고 정의와 부정의를 판단하기에는 사회가 너무나 복잡하다. 특히 선의에 의해 일하는 현장은 더욱 그러하다. 

30년간 지역사회에 헌신하던 기관이 수탁을 포기한다.
사건의 발단은 식품위생법 위반이었다. 거주시설의 재정적 안정과 장애인들의 자활을 위해 실시되었던 목축사업이 사업자등록과 관련 시설들을 허가받지 않고 장기간 운영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불법으로 판단받기 이전까지 꽤 괜찮은 사업으로 인정받았었다. 농장의 소출을 지역의 유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 나눔을 하거나 바자회를 통해 거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하나의 문제로 탈세, 정당한 노동의 댓가의 미지급, 불결한 위생으로 부정한 기관으로 낙인이 찍힌다. 

요양원에 입사한지 3개월도 안된 신규 입사자가 개인의 신상 변화로 인해 4일의 휴가를 신청한다.
법상 2일의 휴가를 지급받을 수 있지만 나머지 2일은 가불을 받아야 한다. 기관은 신규 입사사자의 사정이 휴가가 필요한 상황이라 판단하여 2일의 휴가를 가불해 준다. 그리고 그 직원은 1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근로기준법대로 총 11일의 휴가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2일의 가불된 휴가는 실제 근무한 것이 아니고 법상 의무사항이 아닌 것임으로 동 기간에 청구한 급여비용에 대해 환수결정이 내려진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불법, 부정기관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사회복지기관은 강력한 법으로 통제된다. 반면,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법보다는 선의에 의해 일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법이란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때로는 재량권이 발동되기도 하고 어느 적정한 선에서는 법위반이라고 하더라도 인정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선의에 의한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한 것이기에, 법도 역시 그 선의를 인정한다.
아주 흔한 사례를 들면 카페와 바자회이다. 모두 사업자 등록을 하여 시장경제 안에 들어와 운영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복지관들이 운영되는 카페들을 보면 사업자 등록이 없는 경우들이 있다. 바자회 역시도 사업자 등록을 하고 운영되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불법행위이다. 그리고 주변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싼 가격에 의해 소비자들이 유입됨으로 주변 상권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은 선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선의란 수익의 목적이 개인이나 시설이 아니라 정당한 곳에 사용될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런데 ‘그 기대란 무엇일까?’ 수익의 100%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쓰여지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운영을 위한 사업이지 직접적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사용되는 비율은 높지 않다. 결국 이러한 수익의 사용처는 간접적 성격이라 보아야 한다.

나눔의 집 홈페이지
나눔의 집 홈페이지

 

어르신들에게 직접적으로 후원금이 사용되지 않지만 어르신들이 계시는 시설의 운영비로 사용됨으로써 간접적으로 혜택이 제공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곳이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 집이라는 무료양로시설이다. 

후원자들이 어르신들을 위해 써 달라고 기부를 한다. 그런데 이곳은 법정시설임으로 운영비와 인건비가 공공으로부터 지원되고 있다. 더군다나 이들 어르신들의 의료비 등도 국가로부터 보장된다. 어르신을 지정한 1:1 후원이 아니라면 현금의 지급도 곤란하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어르신은 여섯 분이시다. 그러하니 시설의 지출행위가 후원금이 쌓이는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나눔의 집은 후원자들에게 후원금의 입금을 시설회계가 아닌 법인회계로 유도하게 된다.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긴다.
후원자들은 어르신들을 위해 써달라고 후원을 했는데 법인으로 후원이 되면서 후원금을 사용할 수 있는 사업의 폭이 넓어지게 된다. 법인은 그 목적사업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시설은 후원금의 사용처로 생활관 증축을 결정한다. 어찌되었든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을 확충하기 위한 사업이니 어르신들을 위해 쓰여 지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간접적 성격인 지출행위이다.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긴다. 시설의 후원금의 용도로는 건물 증축이나 신축을 할 수 없다. 그러하니 불법이다. 그것이 법이다. 여기에 대해 언론은 후원자의 기부목적 외 사용을 했다는 워딩을 단다. 

계속 쌓여가는 후원금을 목적대로 사용하고자 요양원 사업이 이사회에서 거론된다. 요양사업은 해당법인의 목적사업이기도 하고 그 사업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경기도의 감사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설은 요양원을 신축할 수 없다. 법인이 사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사회로부터 흘러나온 요양원 사업은 법인회계로 가능한 사업이다. 쌓여만 가는 시설회계의 후원금이 감당이 되지 않아 법인으로 후원을 유도하였고 후원자들이 법인회계로 후원을 한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사용하기 위해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대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것을 호텔식 요양원으로 물어 뜯는다. 만약 이사회에서 후원금의 용처로 병원을 신축하자고 하였다면 언론은 어떤 워딩을 하였을까? 그리고 대중은 호텔식 요양원만큼이나 지탄을 했을까? 그렇게 많은 후원금을 받아가지고 호텔식의 좋은 요양원으로 신축하면 부도덕한 것인가? 평범한 요양원을 신축하였다면 ‘그 돈 다 어디 갔냐고 하면서 지탄을 하지 않았을까?’ 

나눔의 집과 관련한 논란을 다룬 언론 기사들 @구글 뉴스화면 캡쳐
나눔의 집과 관련한 논란을 다룬 언론 기사들 @구글 뉴스화면 캡쳐

나눔의 집 직원들도 의아했을 것이다. 남아도는 후원금을 어르신을 위해 쓰지 않고 증축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내부고발자인 학예사는 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증축을 하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어르신의 거주공간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의 경우에도 후원금이 많으면 직원을 더 고용해야지 자신들이 고생스러워지는 증축을 결정한 시설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원금으로 인건비를 쓸 수 있는 것으로 법이 변경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후원금의 인건비 사용은 사회적으로 관대하지도 않다. 어르신의 수는 줄어든다. 특정 목적을 위한 양로시설임으로 어르신의 추가적 입소는 없다. 어르신이 감소하였을 때 인위적으로 직원을 감소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러 상황에서 직원을 충원하는 것이 적정한 선택일까? 직원들의 보수를 올려주는 것이 유익일까?

언론은 이를 물어 뜯을 수도 있다. ‘어르신 여섯 분에 직원은 OO명! 후원금으로 방만한 운영! 후원금으로 급여 올려!’ 

어찌되었든 이것은 법에 위반되었음으로 불법이다. 어찌되었든 소중한 후원금을 어르신들을 위해 쓰지 않은 것은 부적정하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비리의 행태와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비도덕적인 것은 사실이다. 법의 무지와 행정의 오류는 이해의 여지가 있겠지만 청지기 역할을 소홀히 한 것은 나태의 문제, 도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들은 비리와 착취라는 프레임으로 기정사실화 한 채 이 사건을 보도한다. 전후사정, 기관의 역사적 맥락, 비영리법인의 행정 취약성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불법이라는 워딩으로 물어 뜯어 버린다. 나태의 문제치고는 대중이 내리는 도덕적 처벌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 아닐까? 

선의는 언제나 적법과 불법의 한 가운데에 있다. 그럼으로 비영리조직은 법에 취약하다. 부적정이 불법으로 워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에 대한 피해는 수년간 헌신적으로 일해 온 현장을 물어 뜯어 먹는다. 그리고 아무도 대변하지 않는다. 부정의를 보도하는 언론의 편에 있다고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언론에 반대편에 있다고 부정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싶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순간, 그는 부정의한 사람으로 내몰린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을 알려고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이어야 하는가, 누가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것인가, 대중일까?’

아니다. 우리의 몫이다. 나눔의 집과 같은 기사가 송출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공동의 피의자이다. 선의에 의해 일하는 사람들이 가진 취약성 때문이다. 어느 누구고 법과 언론 앞에서는 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장의 동료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동지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가 피의자가 되었을 때, ‘그 놈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면서 언론보도를 팔로우하는 친구는 없을 것이다. 먼저 사실관계를 파악해보고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것이 동지이자 친구이다.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된 후 분노하고 비판해도 늦지 않는다. 비록 실망한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알려고 하고 이성적 판단을 하려는 노력은 우리들의 몫이다.

부정의와 정의의 구별은 언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섣부른 정의의 단죄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이성을 언론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사회에 정의를 세우는 길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언론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에게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대안은 언론과 법에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이다. 이 이성의 지배아래 객관적인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여 절차적인 공정을 이룰 때 합리적 대안을 얻을 수 있다. 나눔의 집과 관련되어 비영리 법인의 목적과 사회의 기대, 법인과 시설의 역할과 결정권한, 사회적 약자와 이해관계자들의 의견 수렴 등이 이슈의 본질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정의를 찾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정의와 부정의 사이에 있는 비영리조직의 선의를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지켜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