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이 안아까운 스웨덴 사람들
세금이 안아까운 스웨덴 사람들
  • 박종규
  • 승인 2019.03.1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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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오늘은 이모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7시에 일어났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잔 것 같다. 처음 외각으로 나가야하니 겁도 나고(며칠전 길을 잃었던게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해서 인터넷과 지도를 총동원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최 관장에게 전화해 숙박비를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으니 이모님 경험이 있으셔서 이야기하실꺼란다.

아침식사로 라운지에서 어제 사온 곡물스틱과 치즈로 해결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듯한 친구가 왔다 갔다 한다. 이모님은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고, 아직 시간이 많아서 스웨덴 국회와 스톡홀름 시청에서 사진을 찍은 후 가능하면 대사관 앞에서도 찍을 요량으로 출발했다.

스톡홀름 시청쪽으로 가는데 아까 그 친구가 앞에 걸어간다. 가는 방향이 같은데 괜히 이상할까봐 “한국분이세요?”하고 물었다.
교환학생으로 독일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개학까지 시간이 있어서 여행으로 둘러보러 왔단다. 그래서 며칠간 돌아본 정보를 공유해줬고, 감라스탄까지 동행하게 돼 스웨덴 국회와 스톡홀름 시청에서 새밧사에서 부탁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알려준 정보! 구글맵은 GPS를 받는 것이라서 데이터 송신 안해도 된단다. 즉 wifi가 없어도 가능하단다. 올커니~~~! 배워야혀!!! 이것만 알았어도 길을 헤매지는 않았을 것인데. 한얼이와 한슬이도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나가보는 것을 권유해야겠다. 어찌했던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감라스탄에서부터는 혼자 슬룹센역으로 가 버스타는 곳이 어디인지 물으니 지하에 있단다. “뭔소리랴~~” 한달짜리 교통카드를 사서 내려가 보니 정말 지하철 역 아래 시외버스터미널같은 것이 있다. 
조심스럽게 474버스를 타고 구스타브베리로 출발. 차창 밖으로 며칠전 헤메던 길을 지나간다. 하하하. 전날 헤메던 내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웃었다.

구스타브베리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오래된 교회를 올라가보니 보트가 많이 있는 선착장이 보여서 음악을 들으면서 돌아다니다보니 마음이 좀 편안하다. 진작 음악들으면서 다닐걸... 간단히 식사도 했다.

이모님을 드리려고 꽃화분을 사서 1시반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니 한무리의 일본인들이 내린다. “스시집도 더러 있었는데, 일본사람들은 많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사이에 이모님이 날 한눈에 알아보신다.

이모님인데 최 관장 아버님을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실수를 ㅠㅠ 그런데 이모님도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웃는다.  

이모님 집을 가면서, 또 집에서 이모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모님은 1971년 열여덜의 나이로 스웨덴에 오셔서 요양원간호사로 일하시기 시작했다고. 1974년에 (이모부) 로이네를 만나 스웨덴어를 공부하고 로이네도 공부를 더해서 1976년에야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스웨덴은 공부하면 등록금은 무료고, 국가에서 책 사고 필요한 학생활동하라고 돈도 주고, 생활비 대출도 해주는데 이모님은 대출받지 말고 아껴서 살아야 한다고, 주말에도 근무하셨단다. 한국에 살고계신 어머님들 같아 마음이 찡했다. 
난 왜 여성들이 더 강하고 남성들을 보호한다고 생각이될까. 나만해도 그렇다. 길을 열어주고 할 일을 하게해준 것이 고맙다.
이모님은 나름 스웨덴의 여성인권이 발전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아직 대기업의 임원의 성비는 여성이 너무 적어서 스웨덴에서는 임원의 성비를 맞추지 않으면 벌금과 같은 제제를 하려고 하고있다고 말씀하셨다. 

한국에는 아직 어머님이 살아계신데, 요양보호사가 4시간씩 집을 방문해서 해주는 것이 스웨덴보다 좋다고 하신다. 
스웨덴은 이전만 하더라도 자기집에서 쓰던 물건을(새도 가능) 가지고 요양원으로 들어가는데, 요양원에서 식사를 준비해주지만 일주일에 하루씩(?) 버스로 쇼핑을 가서 자신이 먹고싶은 음식을 사와서 식사때 요구하면 조리사가 2명이 있어 각자 해준다고 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술을 많이 사와서 항상 술을 먹었는데 취한적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식판에 나오는 우리의 일괄적인 방식에서 어르신이 사온 것을 일주일에 한번쯤 해드릴 것의 고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은 최근 요양원을 없애고 집으로 우리의 요양보호사같은 분이 오시는데, 하루에 10회, 밤에도 온다고 한다. 매번 사람이 바뀌어서 귀찮고 싫고, 시골은 집마다 거리가 멀어서 들러서 약만 주고 가는 경우도 많아 생활관리가 안된다고 불만이 높아 연일 매스컴에서 떠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시골의 방문요양사나 장애인생활보조 등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지켜볼 만하다. 

스웨덴은 출산과 육아휴가를 받고 급여의 80%를 받는다고 한다. 육아휴직기간은 부부합해 480일, 주말을 빼면 24개월이다. 여긴 날짜로 계산하고 주말은 원래 쉬던 날이다. 그리고 아빠, 엄마 어느 한쪽은 60일 이상 육아휴직을 해야한다.
아이를 기르면 75%만 근무한다. 8시간 기준이니까 6시간만 한다는 뜻이다. 아빠는 늦게 출근, 엄마는 일찍 퇴근. 뭐 이런 것이 지켜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못하게 하면 국가가 제재한다.

내가 아파서 못나가면 급여의 80%, 아이가 아프면 급여의 90%를 받는다.
우리는 급여산정 방법이 일급이나 시급을 기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도입하기가 힘들다. 이것은 고민해볼 이야기다. 대기업들과 공무원들에게 상여금식으로 지급해 주수당, 월수당, 기말수당 등의 급여를 주던 것이 연봉제 형식으로 바뀌었지만, 그랬던 급여체계가 만일 근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이모님이 아이를 낳았을 때 한국식으로 기르고 싶어서 무급휴직을 하고 집에서 아이를 돌봤다고 한다. 이때 하루에 2시간이상씩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전문보육교사가 지도하고, 아이의 책임은 부모가 지는 것으로 한다. 여기서는 책임이 중요하단다. 선생님이 육아방법과 필요한 사회성 등을 지도한다는 것이다. 물론 무료이다.
내가 있던 산성종합사회복지관의 ‘찾아가는 유아교육’프로그램과 유사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사회성! 그래서 이경선 보육교사 겸  사회복지사가 그룹활동을 했던 것 같다. 한얼이도 어머님이 기르실 때 교회에서 아이 학교라는 것을 해서 좋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이 아닐까??

이모님은 양아들이 있다. 12살 어린아이의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외할머니집에 혼자 있었는데 매일 이모님집에 놀러와서 밥도 먹이고 여름집도 데려가며 거의 기르셨단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었던시기에 그저 받아준 이모님이 길러준 어머니인 셈이다.

당시에 이모님은 자녀가 없었고, 사랑을 쏟을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한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니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컴퓨터관련 일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아이들도 데려오고 가고 한단다. 마치 예전에 방학 때면 우리가 시골에 내려갔듯 말이다. 그 아들도 이혼해서 큰 아들은 대학생이고, 두 번째 부인의 아이는 어리다고 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이혼해도 아이가 혹시라도 자기 때문에 이혼 한 것이라고 생각할까봐 자녀양육을 위해서 가까이에 살고, 서로 똑같이 데리고가서 양육을 한다고한다. 이것은 재혼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여름휴가에 서로 재혼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함께 휴가를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린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어느 사회가 더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까. 스웨덴? 대한민국?
우리는 보호의 책임을 가족으로 두고 있다. 그래서 아이가 장애가 있으면 엄마 아빠가 고생을 하고, 가족 중에 누가 아파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가족적이라고 봐야할까. 가족을 망치는건 아닐까.
사람은 자신이 힘들어지기 시작하면 더 좁게보고 작은 일에도 날카로워진다. 국가가 개인의 삶의 어려움에 대해 보호해야하는 책임은 헌법에 34조에 잘 나와있는데 실정법상 우리는 아직까지 부양의무자가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헌법에 나온 국가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고민된다. 

이모님이 병원에서 일을 하셔서 병원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병원비는 하루에 1100원(80크로나)라고 한다 어떤 약을쓰고 무슨 검사를 해도 똑같다. 그리고, 총병원비는 1년에 ?크로나(약100만원-자세하지 않음)을 못 넘게 한다고. 넘으면 국가가 부담한다. 

세금은 역시 많이 낸다 이모님 부부는 수입이 적어서 30%정도 낸다고 한다. 많이 버는 사람은 70%까지 낸다고한다. 그런데 아파서 전년도 수입보다 적으면 환급해주고, 집을 사서 돈이 많이 들어갔어도 환급해준다고 한다. 그런 것 아니면 세금 내는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긍정적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이정도해주면 우리도 낼 수 있지 않나?

이모가 처음 남편 로이네를 만났을 때 유치원교사였다고 한다. 당시 여성이 주로 하는 일이라 급여가 적었다고.(70년대까지는 평등으로 달려가던 시기이지 아직 낮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로이네가 공부해서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딸 수 있도록 20대 중반에 다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등록금 무료와 학비지원이 있었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음악을 좋아해서 기타가 10개정도 있고, 모니터가 큰 컴퓨터로 뭔가 음악에 관련된 것을 한다.

여름집은 더 크다. 로이네의 할아버지때부터 있었던 집이라고 하는데, 4시간정도 차를 몰고가야한다. 
지금의 이모님 집은 구스타브베리의 그릇 회사에서 직원용으로 1940년대 지어져서 1980년대에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0여년밖에 안되어 보인다. 가구와 마루바닥은 이모부가 거의 만들었다고한다. 지하에는 빨래를 하고, 물건을 만드는 작업공간이 있다. 

내가 있을 공간은 별채로 따로 있는데 침대와 책상, 소파, 이렇게 있다. 성산동에 살 때의 다락방 같다. 
점심먹은지 1시간도 안되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고, 3시간도 안되어서 저녁을 먹었다. 과식했다. 빠진 뱃살이 다시 나오려고 한다. 

이모님이 이야기하게 하고 그것을 글로 써서 자서전을 만들어서 보내드릴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