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진정한 의미…영화 '목소리의 형태'
소통의 진정한 의미…영화 '목소리의 형태'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7.15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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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The shape of Voice, 2016).  
감독-야마다 나오코 | 일본 | 애니메이션 | 2017.05.09 개봉 | 전체관람가 | 129분

적막이 흐르는 흑의 세계 정 가운데에 작은 빛 하나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빛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화면에는 'A point of light.'라는 자막이 나타나며 장면전환. 남자주인공인 듯 보이는 인물이 중요한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 매일 같이 달력 날짜에 X자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을 은행에서 찾는 장면, 잠든 엄마 곁에 하얀 봉투와 함께 “돈 갚을게요.”란 메모를 살며시 두고 나가는 장면, 강가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모습이 이어지면서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는 시작된다. 벚꽃이 흩날리는 화사한 봄의 배경화면과는 달리 주인공에게는 내일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의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화면은 전학 온 여학생 쇼코가 필담용 노트로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과 그 모습을 비웃듯 쳐다보는 남학생 쇼야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제목과 오프닝이 연결고리가 되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미뤄 짐작되었지만, 섣부른 예단으로 몰입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원작과 애니메이션 모두 작품성으로는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는 선입견과 신뢰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초반의 이야기들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앞서 필담용 노트로 자기소개를 하던 쇼코의 모습에서 그녀가 청각장애가 있음을 인지하기는 어렵지 않으며, 그런 쇼코와 짝이 된 쇼야는 쇼코를 앞장서서 괴롭히고 반 친구들도 거들며 집단 따돌림이 시작된다. 그 강도는 하루하루 점점 더 심해져 쇼코의 필담 노트를 연못에 던지고, 보청기도 집어 던져 망가뜨리는 등 친구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려는 쇼코의 노력과 의지를 꺾어버리는 원초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을 가한다. 

평생 치유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에 상체기를 내는 폭력과 혐오의 말들. 견디다 못한 쇼코는 그동안 당했던 일들을 학교에 알리고 전학을 간다. 쇼야는 따돌림의 동조자들이었던 반 친구들에게 주동자로 지목 당해 학교에서 친구들의 쑥덕거림과 혐오스런 시선들을 받으며 혼자가 된다. 결국 쇼코의 입장에 서게 된 쇼야는 자신의 어머니가 쇼쿄의 어머니에게 보청기 값을 갚아주며 사과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그때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쇼쿄에게 사과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한다. 그 후 쇼코는 죄책감에 대인기피증과 실어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

한편,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인 쇼코 역시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의 장애도, 모습도 부정하고 거부하며 자살까지 생각하는 삶을 살아간다. 집단따돌림은 피해자인 쇼야는 물론 가해자인 쇼코 역시 자살을 생각하는,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만든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 형태’ 속 지배욕과 우월의식, 편견을 이야기하다

<목소리의 형태>가 집단 따돌림을 단순히 흑백논리로만 풀어냈더라면, 평범하고 익숙한 이야기, 빤한 메시지가 전해졌을지 모른다. 다행히 작품은 집단 따돌림 행태의 무서움을, 가해자가 피해지가 된 상황과 사건 당사자들의 사과와 용서에 집중하며 담아낸다. 이 과정에서 소통의 도구인 언어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다는 것이 차별화와 깊이를 보태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목소리의 형태>에는 소통의 도구로 세 가지의 언어가 등장하는데, 노트에 적은 글씨로 소통하는 필담, 손으로 소통하는 수어, 그리고 음성으로 소통하는 구어가 그것이다. 초반에는 쇼야와 쇼코가 이를 자신의 언어와 타인의 언어, 그리고 필담과 같은 그 둘 사이에 놓인 제 3의 언어로 규정지으며 다수가 사용하는 음성언어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쇼야와 반 친구들은 쇼코에게 일방적인 편 가르기를 하며 혐오의 시선과 말, 행동으로 폭력을 가한다. 감독은 ‘목소리’ 즉 언어형태의 다양함과 그 이면에 숨겨진 언어의 우월의식과 지배욕, 편견을 드러내고 획일적인 의식을 비판하는 이중의 서사구조를 택한 것이다.

그렇다. 획일적인 사고와 편리만을 추구하는 편협한 세상은 다양성의 가치가 실종되고 일방적인 사고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언어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영어를 세계 공통 언어로 지정해 영어를 하면 뭔가 근사해 보이고 엘리트인 것처럼 여기는 선입견이 생겼고, 못하면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은 불안함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된다. 언어의 계급주의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수어와 구어, 필담도 마찬가지다. 모두 그저 소통방식이 다른 언어일 뿐인데. 음성언어인 구어를 인간의 중심 언어라고 규정하고 수어나 필담은  특별한 사람들의 언어, 즉 청각방애를 가지거나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보조적인 개념의 언어로 인식해 폄하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배어 있는 것이다.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중심언어로 지향하는 음성언어는 소통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소통은 상호적이어야 하는데 말을 한다는 것은 일방적이다. 말을 하고 나면 어떻게 듣고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온전히 듣는 사람의 몫이 된다. 그러나 언어가 문자나 신체와 관련이 되면 글을 읽어야 하고, 기호를 익혀야 한다. 소통에 필요한 상호간의 존중과 의지, 수고가 수반되는, 소통의 원천에서 보면 수어나 필담은 완벽한 언어들이다.

수어와 필담이 구어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모든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고, 수어도 구어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보편적인 기능을 충분히 갖춘 언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수어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차별과 언어의 이데올로기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장애의 수동적 이미지와 극복의 패러다임이 투영된 캐릭터 ‘쇼코’.

사실 쇼코는 답답할 정도로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캐릭터다. 늘 습관적인 억지웃음과 기계적으로 “미안해”를 연발하며, 모든 것이 자기 탓, 자기 잘못이라는 아이.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특히 가족의 시선 속에서 소통에서의 수많은 거부와 무시, 배제를 당한 경험 때문일까? 몸에 밴 습관, 굳어진 사고 같아 안쓰러울 정도다.

한편으로 쇼코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신의 일부인 장애를 인정받지 못하고 이것이 소통의 장애물과 차별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수없는 좌절감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는 아이가 자존감이 높고 자신의 의사와 의견을 톡 부러지게 전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억압이고 억지이며 비현실적일지 모른다. 심지어 학교 친구들에게 집단적으로 따돌려지고 온갖 혐오적인 말들과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가 자신에 대해, 또 장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생각과 행동이 몸에 배었을지는 자명하다.

그런데 쇼코는 왜 수어를 쓰지 않고 구어와 필담으로 소통하려 했을까? 이 물음이 직접적으로 와 닿았던 장면이 있다. 쇼코가 전학 온 후, 학생들이 수어를 배울 수 있게 수어교실을 열고 지원 신청을 받는다. 신청한 학생이 한 명뿐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관심조차도 갖지 않는다. 결국 수어교실 개설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리고 쇼코가 전학을 간다.

이 장면에서 일본 역시 장애를 비정상으로 인식하고 극복 패러다임을 덧씌운, 다름을 배타하며, 혐오와, 폄하의 시선이 만연한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의 인식을 벗어날 수 없는 학교 친구들과 가족에게 둘러싸여 수어에 관심도 없고 천대하며 사용을 꺼리는 세상에서 보청기와 구어, 필담은 쇼코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소통을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는 배우고 익힌다고 고쳐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맞지 않는 옷과 신발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고 어둔할 수밖에 없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늘 이처럼 쇼코의 일방적인 노력과 수고, 의지만이 강요되는 세상. 이 얼마나 불평등하고 비인권적 관계의 차별이고 폭력적인 소통관계인가?  

쇼코는 바로 이 불평등한 세상, 다르므로 소수가 되고 이를 비정상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사회에서 장애나 수어의 인식, 특히 현재 수어의 사회적 위치가 투영된 캐릭터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아이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이 이러니 순응하고 체념하면서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하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모습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무언가가 불끈불끈 치밀어 TV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대중매체에서 장애를 가진 캐릭터는 왜 늘 현실의 불평등과 부당함, 억압에 순응하고 감내하는 삶과 모습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사실 현실에서 만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이 억압과 부당함에 맞장을 떠 불평등과 차별을 알리며 장애 인권을 이야기하는, 그래서 아주 천천히 조금 조금씩이지만 인식과 제도를 개선시키고 변화시키는 데 주체적이고 행동적인 장애 당사자들이 훨씬 더 많은데도 말이다.  

물론 이런 세상의 시선을 비틀고 서로 다르다는 것은 소수성이 아닌 보편성이라는 것을 몇몇 장면들과 대사들, 그리고 흐름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다만 기존 인식이나 수어 중심의 소통방식에 태클걸기를 담은 대사나 장면들이 쇼코가 아닌 쇼야나 비장애 친구들의 입에서, 또 쇼야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쇼코가 자신의 문제임에도 주도적이지 못하고 회피적이라는 이미지를 도드라지게 해, 의도와는 다른 해석들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준다.

 

한 예로, 비장애 친구들의 몇몇 세상 인식의 날 선 대사들 중, 관람차 안에서 쇼코에게 친구가 던지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네가 읽을 수 있게 천천히 말할 거고, 네 목소리도 귀 기우려 들을 거니까 노트는 집어치우라고.” 하는 대사였는데, 소통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쇼코에게 피하지 말고 툭 터놓고 이야기 해보자는 말이어서 얼핏 들으면 사이다처럼 톡 쏘고 시원하다. 그러나 한 글자씩 의미를 되새겨 보면 일방적이며, 우월의식이 담겨 있음이 전해진다. 무엇보다 구어를 중심에 두고 소통을 회피하고 원활치 않음이 쇼코만의 책임인 양 오인될 수 있는 문맥이다. 

이 대사에 이어 쇼코가 "너도 내 말 무시하고 배우지 않잖아.” “그러니 내가 볼 수 있게 또박또박 천천히 말 해주고, 네가 수어를 못 하니까 내 글에 집중해 줘.” 라고 되받아쳤더라면 어땠을까? 소통하는데 서로의 언어를 존중하고 자신의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소통의 주체,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는 당찬 모습의 쇼코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양한 상황들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 소통만을 지향한 그동안의 구어 중심의 소통방식의 문제의식을 좀 더 명확히 전달하며 펀치 한방을 날랴주는 통쾌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장애 당사자의 시선으로 보고 생각하면 보이는 본질적인 것들이 비장애 시선에서 다뤄질 때 희석되고 왜곡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을 왜 모를까?  

장애 극복 패러다임은 장애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 것

한편, 쇼코에게 사과하기 위해 쇼야가 수어를 배우고, 쇼코와 쇼야가 수어와 구어가 어느 누구의 소통체계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두 사람이 손과 입을 사용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서야 오해가 풀리고, 용서가 되는 마지막 장면은 <목소리의 형태>가 전하고자 하는 다름의 존중과 마음을 전하는 방법, 특히 수어와 구어의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결국 서로 다른 ‘목소리의 형태’를 인정하는 순간 자실까지 생각했던 적막 같은 삶에서 하나의 빛을 찾았고 그 빛, 즉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는 좌표였음이 전해진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다름을 또 장애를 결함 내지는 비정상으로 보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는 구어 중심인 소통체계만을 인정해 수어를 무시하고 폄하, 혐오하는 시선으로 전이되었고, 구어사용을 지향하고 강요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농인 중 유아기와 아동기에 수어를 배운 비율이 26.5%라 하고, 2008년 국립 국어원의 조사에 따르면 농인 중 3%만이 부모를 통해 수어를 배우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비장애 아동이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김철환, 장애, 그 자체를 인정하는 사회를 꿈꾸다. 미디어 생활 발췌, 재구성).

이 조사결과들에서 농인 당사자에게도, 그 가족에게도 수어사용을 꺼려하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래서 가족들끼리도 수어사용을 지양하고 농인들은 어릴 때부터 보청기를 끼고 구어를 배우거나 구어를 배우지 않으면 가족들과도 소통이 원활치 않은 현실적인 문제, 특히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 역시 자녀가 수어를 배우는 것을 꺼리는 문화여서 언어의 계승적 의미에서도 수어의 입지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며,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들은 선택이 더 이상 개인에게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심각함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장애계에서 문제제기를 해 이슈가 되고 있는 음성 AI와 인공와우와 같은 기술개발의 관점, 무엇보다도 이를 어필하고 홍보하는 광고의 관점과 방향에 내포된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장애계의 특히 농인들의 문제 제기의 본질이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하나이며, 장애의 본질 역시 하나다. 생득적이고 필연적이라는 것. 그래서 장애를 가질 수는 있지만, 고치거나 사라지고 없어지게 할 수는 없다. 나를 비롯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장애로 인한 여러 가지 불편함은 있지만, 장애 자체를 부정당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극복이나 연민이 아닌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보이는 불편함과 통증을 덜어주고 줄여주는 방향에서 의학과 과학의 기술개발과 지원들을 원할 뿐이다. 그래서 모든 영상물에 수어와 자막, 화면해설을 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고, 인공와우와 음성 AI보다 농인이 더 나은 삶과 사회참여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도록 음성언어를 수어와 문자로 통역해주는 기술개발이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농인들의 인식과 지적은 충분히 공감되고 합당하다. 

장애와 비장애, 수어와 구어의 공존을 무시하는 기술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기술개발은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욕구가 있음이 전재된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없애버리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쇼코가 쇼야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들 중 뒷머리를 때려 목덜미로 피가 흐른다거나 물세례를 당하는 장면, 보청기를 집어던지고 노트를 물속에 빠뜨리며 놀리는 장면 등 현실에서 가능한 폭력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직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고 옳고 그름의 도덕적 판단이나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충분히 모방할 수 있는 폭력들이라 우려가 된다.

특히 집단 따돌림과 같은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부모님이 함께 보시길 권하고 싶다.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중심이고 몽환적으로 연출되는 장면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만 10세 이상인 초등고학년 어린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목소리의 형태>를 보면서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말하지 않는 쇼코의 행동이나 무조건 ‘미안해’라고 말하는 모습을 답답해하기에 앞서, ‘왜 항상, 어느 상황에서든 화를 내거나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됐는지’, 또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습관적으로 “미안해” 라고 말하는 아이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끔 질문해주실 것을 가장 당부하고 싶다.

더불어 쇼코가 청각장애로 인해 놀림이나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난 장애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고 행복해.’라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공부하고 노는 관계, 이를 위해 어떤 것들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깊게 이야기해주시면 싶다. 어릴 때부터 이런 대화들이, 앞으로 다양한 관계 속에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인생에서 ‘A point of light.’가 되어주는 중요하고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