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그게 중요해"
‘나’는 ‘나’…"그게 중요해"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9.09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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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보리'

나는 보리(Bori, 2018 제작).
감독_김진유. 출연_김아송, 이린하, 황유림, 곽진석 외.
한국 | 드라마 | 2020.05.21 개봉 | 전체관람가 | 110분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라고 영화 <나는 보리> 내내 주인공 ‘보리’에게 아빠가 따뜻한 미소와 손짓으로 말해준다.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보고 말하든 ‘나는 나’, ‘보리는 보리’, ‘정우는 정우’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 아니 ‘나’를 규정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여성인가? 남성인가?, 미혼인가? 기혼인가?, 아이가 있는가? 없는가?, 장애를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 등. 

또 그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차별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성이. 미혼이, 장애가, 내가 그동안 살면서 덧대어진 부산물이지만, ‘나’란 사람을 규정하는 전부 또는 중심이 될 수 없다. 나는 그 자체로써 ‘나’, 오롯이 ‘내 자신’으로 태어났고 존재하는 이유이지 않는가.

영화 <나는 보리>에서 가족 중 유일하게 청인인 ‘보리’는 자신의 정체성, 아니 가족과 똑같아져서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소리를 잃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고민한다. 
이런 딸에게, ‘우린 똑같다’고, ‘너는 그 자체로써 너고 우리 딸이야.’ ‘그게 중요해.’라고 아빠, 엄마가 보내는 응원과 지지를,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 쓴 정성어린 손 편지처럼 차분히, 조근 조근,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극적 갈등이나 극적 감동을 많이 생략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도 하지만, 오히려 농인들의 현실과 그 그룹에 속하지 못했을 때 받는 차별과 위축, 소와감 등이 생생하게 다가왔고 상황 상황이 명확히 읽히며, 본질과 원인을 깊이 생각해보게 했다. 개중에는 이런 전개와 연출들이 늘어지고 지루하다고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때론 상대가 차분히, 조근 조근, 단백하게 말할 때, 오히려 더 귀 기우려 듣게 되고 이야기가 더 명확하게 들릴 때가 있는 것처럼, 내겐 이 영화가 그랬다.

 

소원이 이뤄진 후, 비로써 만나게 되는 편견과 혐오, 차별 덩어리의 세상

보리는 ‘소리’를 잃는 것이 소원인 아이다. 자장면 두 그릇을 시키면 탕수육이 서비스로 오는 판타지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마을에서 따뜻하고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보리네 가족. 그러나 가족과 함께 있다 보면 늘 보리는 알 수 없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보리에게 ‘소리’는 가족들과 멀어지게 하는 ‘장애’로 느껴졌으리라. 보통 이런 경우, 가족들이 소리를 듣고 말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 텐데, 보리는 늘 자신이 소리를 잃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다.

아마도 보리는 자연스럽게 아빠, 엄마, 동생의 장애는 고쳐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신이 소리를 잃는 것을 소원하는 아이라는 상황의 전복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학교에서 장애인권교육을 잘 받은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보리의 경우는 가족과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져 생각과 몸에 배인 인식일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장애를 부정적인 것은 물론, 불편한 것으로도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란 자장면, 피자, 치킨을 주문하고 전화가 올 때, 밖에 손님이 찾아 왔을 때 정도. 그나마 불편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보리가 자연스럽게 처리한다. 보리가 집에 없을 때 불편한 상황들은 과감히 생략시킨다. 

감독은 이렇게 연출이나 서사에서 장애가 덧대어진 시선을 경계한다. 
그렇다. 그 불편함은 상상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보리네 가족이 그동안 살아 온 노하우들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정도이고 이 가족의 일상의 행복을 좌지우지 하는 문제들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관객의 동정심과 시혜적 시선을 자극하는 거리들을 제공할 뿐이다.  

보리가 소리를 잃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학교 오갈 때마다 사당에서, 단오 날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시장에 갔다가 가족을 잃어버린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가장 큰 불꽃이 퍼질 때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이 생각나 멈춰 서서 두 손을 모은다. 그리고 외국인 상점에서 부적을 지니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주인의 말에 덜커덩 사버린다. 결국 아이다운 생각과 결행 끝에(스포일러 때문에 생략) 소원대로 가족과 똑같아지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가족과 같아지자 보이는 세상은 그동안 보리가 보았던 세상과 많이 달랐다. 친절하기만 하던 동네 사람들은 보리까지 어쩌다 저렇게 됐냐며 불쌍하게만 바라보고, 상점 점원은 “벙어리”라고 스스럼없이 비하 하고, 바가지까지 씌운다. 친구들은 들리지 않는다고 보리에겐 인사도 하지 않고 무시한다. 소원을 이룬 후 만난 세상은 이처럼 편견과 혐오, 차별로 둘러  싸인 세상이었고, 그동안 청인인 보리가 가족들 옆에 없을 때 아빠, 엄마, 동생 정우가 매일 겪고 들으며 보는 일들과 말, 시선이었던 것이다.  

 

“모두 다 수어를 했으면 좋겠어.”

보리가 소리를 잃고 난 후 정우에게 묻는다. “수업시간에 뭐 해?” 정우는 “자거나 그림 그려.” / “선생님도 이해해. 선생님도 아마 어려울 거야.” 라고 답하며, “누나는 말하는 걸 잘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 보리가 또 묻는다. “친구들은?” / “축구할 때 빼고 잘 안 놀아. 나 혼자 놀아.”, “그래서 축구가 좋아.”라고 정우가 말한다.

학교 축구부 선수들 중 정우가 축구를 제일 잘하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연히 주전으로 뛸 거라고 믿었는데, 대회가 시작되고 정우가 주전에서 빠지고 후보가 된 사실을 알게 된다. 이유는 지시 수행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리의 항의기 있어서긴 하지만 그보다 축구부에서 정우를 대신할 공격수가 없어서 후반전에 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정우가 이미 받은 상처는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이, 오래 자리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정우는 와우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그러자 보리는 걱정스럽게 또 묻는다. “정말 수술을 받고 싶냐”고. 정우는 말한다. “수술 받을 거야. 듣고 싶어서라기보다 친구와 대화하고 싶어서.” 라고 말이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모두 다 수어를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들리지 않아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을 그냥 방치하는 담임이나 학교, 능력이 아닌 듣지 못해 지시수행이 안 될 거라는 이유로 배제가 당연시되는 차별이, 소통 방식이 다르다고 외톨이가 되는 편견과 혐오, 무시가 일상화된 비인권적인 학교가, 그동안 정우를 얼마나 외롭게 한 걸까? 

무엇보다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 때가 유일하게 축구할 때였고, 같이 공을 차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축구 연습을 해 실력도 인정받았는데, 장애 때문에 주전에서 탈락했을 때의 그 아픔은 짐작 이상이지 않을까? 이 얼마나 가혹하고 부당한 현실인가. 사실 축구 선수는 축구를 잘하는 것이 우선이고 이 후 소통은 맞춰나가야 할 일이지 배제의 이유가 될 수 없지 않나.

“모두 다 수어를 했으면 좋겠어.” 정우의 말은 그래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우리가 고쳐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수어에 대해서도 물론이고 장애를 가진 이들이 자신의 장애를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현재의 교육방향이나 장애와 관련한 기술 개발 방향은 정우처럼 농인 그 자체로 수어로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와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며, 이는 비장애인들의 잘못된 시선과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장애는 부끄러운 것, 극복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인 장애를 가진 사람 그 자체로, 비장애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음을 인정받고 동시에 주어지는 의무를 이행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한 사람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농 학교에서도 한글 읽기와 쓰기 교육이 중심이며, 수어는 점점 보조 수단으로 인식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농 학교는 청각언어를 지원하는 학교가 됐고, 통합학급에서는 정책의 미흡으로 정우처림 농 학생들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연히 농인들의 교육환경은 열약해지고 수어의 입지도 점점 좁아져서 농인들의 사회활동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되어가는 현실을, 그래서 정우처럼 결국 와우수술을 받고 긴 시간 재활훈련과 부작용들을 감수하더라도 청인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환경과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에 우려의 시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독은 이런 장면들을 갈등의 서사나 인위적인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며, 그저 대화나 상황, 동선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연출했다. 그래서 영화 속 정우가 겪는 일들이, 현재 농인들이 현실에서 겪는 차별들과 동일시되며 우리나라 통합교육의 현실, 특히 농 학생의 학습권의 차별을, (학교에 농인 학생이 있고 통합교육을 한다면서 수어통역 지원이 안 되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차분히, 조근 조근, 이성적으로 생각해보게 한다.

정우가 와우 수술을 받기로 하자, 수술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걱정하는 고모에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괜찮다”고 말하는 아빠, 엄마. 부모의 마음으로 이해는 됐지만, 이 부부는 비현실적일 만큼 쿨 해도 너무 쿨 하다. 그러나 보리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정말 수술 받고 싶냐?”고 정우에게 몇 번을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아빠에게도 “정우 수술 받게 할 거냐?”며 재차 묻는다. 보리가 이러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수술 후 정우는 그 좋아하는 축구도, 수영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장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모는 자신의 판단으로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라도 알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만 여기 넘어가야 할 문제인가? 하지만 영화는 고모에 대한 원망은 생략됐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이 부부, 아니 이 가족의 비현실적인 쿨 함이 이들의 삶에서, 또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온다.

사실 정우는 애초부터 소리를 듣고 말하고 싶어서 와우수술을 결심한 아이가 아니다. 단지 친구와 대화하고 싶어서, 무엇보다 감독님의 지시사항을 잘 수행해, 축구를 잘하고 싶어서가 전부였다. 그런데 축구를 못한다. 수술 받을 이유가 사라졌다. 수술 받지 않겠다는 정우의 결정에. 이 쿨 한 가족은 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러자고 결정한다. 수술비용의 걱정보다 정우가 수술을 받겠다는 결정이 더 중요했듯이 고모에 대한 원망보다 수술보다는 축구를 할 수 있는 현재의 삶을 선택한 것에 기뻐하는 가족의 모습에 나도 같이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정우의 결정을 진심으로 존중해주며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라고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가족을 보면서 진심으로 축하와 고마움을 전하며, 이 가족의 기쁨과 행복에 전이 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자기 결정권은 존중되어야 하며, 부모는 조력자의 역할에만 머물며 지켜보면 된다. 결정 후 지지와 응원을 보내면 된다. 말은 쉽지만 많은 부모들이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아쉬웠던 한 가지

이 가족은 너무 조용한 가족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순간순간 음 소거된 줄 알고 몇 번이나 확인했을 정도다. 농인인 가족들 안에서 청인인 보리의 소외감과 외로움, 그리고 농인을 둘러 싼 소리들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연출의 의도로 짐작은 되지만 서로 사랑의 표현이 적극적이고 장난과 웃음이 넘치는 일상인 이 가족에게 풍부할 것 같은 표정과 소리를 빼앗아버린 느낌이었다.

아빠와 정우가 장난치며 내는 웃음소리, 온 가족이 툇마루에 둘러앉자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들뿐만이 아니라, 우스갯소리에 큭큭 대는 웃음소리조차도 이 가족에게는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어떤 감정인지 잘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었다. 때론 대사보다 리엑션, 소리들이 훨씬 더 그 상황에 공감을 줄 때가 있지 않는가. 

현실에서 만나는 농인들과도 많이 달랐다. 풍부한 표정과 빠른 수어가 동반된 음성과 웃음소리로 농인들과 있다 보면 시끄러울 정도다. 이런 자연스런 농인들의 소리가 인위적으로 소거된 듯해 아쉬웠다. 물론 농인들 중에도 표현력이나 감정표현에 소극적인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보라는 가족이 소리를 듣게 해달라는 소원이 아니라 자신이 소리를 잃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는 아이다. 또 정우는 소리를 듣고 말하는 것보다 나 자체로 살며 좋아하는 축구와 수영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아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부모는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라고 말해주며 혼란을 겪을 때마다 중심을 잡아준다. 

이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애 대한, 또 다름에 대한 잘못된 사회의 통념의 그림자라도 밟아 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부터, 오롯이 ‘나’ ‘자신’ 그 자체로써 봐라보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며 “오늘도 고생했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자연스럽게 건네게 되지 않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고, 그랬으면 좋겠다.

결국 보리는 단오 날 시장에서 산 부적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왜 던졌는지의 이유는 영화를 보시면서 확인해보시라는 미끼로 남겨둔다.

 

P. S.: ‘배리어 프리’는 어린이영상물로부터.

영상물의 ‘배리어 프리’의 저변 확대와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려면 어린이들 영화나 TV프로그램, 특히 ‘디즈니’외의 그 계열사인 ‘마블’, ‘픽사’의 작품들을 ‘배리어 프리’버전으로 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판 ‘배리어프리’버전의 ‘디즈니’사와 계열사 작품들은 한 편도 없는 것으로 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지상파 TV 어린이방송시간대에 편성된 어린이프로그램이나 유료어린이채널은 물론이고 전체가 등급의 영화들도 ‘배리어 프리’버전의 작품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디즈니코리아’나 워너브라더스와 같은 국내 상주의 대형 해외영화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어린이영상물 제작사와 어린이방송사들의 ‘배리어 프리’ 지원에 대한 인식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투자가 가져 올 효과는 각 방송사나 기업의 이미지와도 맞물려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로 결국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