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익숙해지는 것
‘장애’, 익숙해지는 것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0.11.2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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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무튼, 아담'

감독_마이클 어펜달, 출연_아론 폴, 레나 올린, 톰 베린저, 마이클 웨스턴 외
미국 | 드라마 | 2020.07.02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00분

나는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나 드라마를 싫어한다. 거의 ‘~ 임에도 불구하고’거나 역경과 고난을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겨내고 극복한 인간 승리의 성공 스토리며, 여기에 감동을 쥐어짜는 신파적인 연출이 더해져 감정이입과 공감을 방해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라는 특별함으로 무장하고, 지극히 개인사적 관점에서 조명된다. 그래서인지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을 건드리는 인물들이 많고, 솔직히 불편하고 거부감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아무튼 아담>은 그것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가지게 된 ‘아담’의 실화를 담은 영화다.

내가 불편해 하고 거북해 하는 조건들을 두루 갖춘 영화라 볼까 말까 갈등이 많았던 영화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는 안 봤으면 후회할 뻔했던 영화로, 우선 감독의 세계관이 마음에 들었고, ‘아담’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을 건드리고, 공감과 연대감을 건드린 부분이 많은 영화로 기억 된다.   

‘장애’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익숙해지기까지 필요한 것들

담보대출 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부장 승진을 코앞에 둔 ‘아담’은 첫눈에 반한 여성 ‘크리스틴’과 지금 막 교제를 시작해 행복의 절정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승진을 자축하는 파티에서 술에 취해, 물이 얕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뛰어드는 퍼포먼스를 펼치다가 목이 꺾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된다.

한 달 만에 깨어난 ‘아담’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절망한다. 충분히 이해된다. 하루아침에 팔과 어깨 쪽 일부 감각을 제외하고는 아무 느낌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 ‘아담’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를 지켜보는 가족, 친구들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것은 지지해주고 독려해주는 사람과 환경, 그리고 사회인식과 지원이며, 이런 조건들이 ‘아담’에게 잘 맞아야 ‘아담’이 장애를 가졌고, 그래서 지금까지 생활해온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되더라도 ‘아담’이 여전히 ‘아담’일 수 있게 하는 것임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장애’는 극복이 아닌 적응과 숙련, 그리고 익숙해짐이라는 것이 전달된다.

 

그럼에도 ‘아담’은 ‘아담’

‘아담’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보통이 아닌 아이였다. 형 ‘로스’와 놀다가 형이 ‘아담’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버리자, 통 유리문을 깨고 들어올 정도로 괴팍하고 욱하는 성질이 있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장애를 가지게 된 후 가족들이 보이는 관심과 과잉 반응들을 대하는 ‘아담’의 태도와 말들을 어느 정도 예상해 볼 수 있었고, 예상대로인 ‘아담’ 그 자체가 공감이 되았다. 이 영화의 리뷰들을 읽으며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았고 마음에 안 들었다는 글을 많이 읽었다. 물론 사람마다 표현방식이 다를 수 있고,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다가도 화가 나고 욕도 나올 것이다. 어찌됐든 도움을 받는 입장인데 좀 부드럽게 말하고 성질대로, 나오는 대로 하는 것보다는 참거나 친절하게 부탁하는 게 당연하지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도 동방예의지국의 사람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으로는 부모한테, 형한테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의하지는 않는다.

‘아담’은 원래 그런 걸 따져가며 참고 상대를 생각해 넘어가고 부드럽게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데다, 상황들이 참을 수 없게 만들지 않았는가. 어머니의 사랑과 염려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었지만, 아버지와 형도 있는데 굳이 어머니가 성인인 아들의 목욕을 돕는다. ‘아담’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아버지와 형이 욕조에서 꺼내 주려 한 행동이었지만 전라의 자신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또 ‘아담’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라면 아마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 순간 ‘아담’이 보인 몸부림과 내뱉은 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공감과 연대감을 건드렸던 장면이다. 이렇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보이고 이해되며, 비로써 존중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아담’은 역시 ‘아담’이다를 입증시켜 줘 크게 웃었던 장면이 있다.

입원했던 병원 치유 프로그램에서 알게 된 ‘러키’의 개조 차를 빌려 연인이었던 ‘크리스틴’을 만나러 간 ‘아담’은 장애인주차구역에 차를 주차하려 한다. 때마침 건물에서 나오던 노부부가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 저기 장애인주차구역이라고 당신이 가서 말해 줘.
할아버지: 거기 장애인주차구역이에요.

그래도 차를 대는 ‘아담’을 보며. 할머니: 나쁜 놈. ‘아담’이 내리는 모습에, 할머니: 이런 죄송해요~ 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보통 이 상황에서 괜찮아요 라며 그냥 지나가는 게 정석이지 않나? 그러나 우리의 아담은 “부인 좀 잘 간수하세요.”라며 파격적으로 예상을 빗나가는데, 이것이 또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이것은 상식이 아니던가. 어느 누가 장애인이 아닌데 이 구역에 주차를 하겠는가 라는 역설적인 화법으로 불법임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노부부의 의식도 남달라 인상적이었기도 하지만, 한 성깔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한 성깔 하는 아담의 뼈 있는 말이, 커피 마시다 목에 걸려 들린 사래에 고통스러웠지만, 아주 오랜만에 통쾌하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의 변함없는 자존감과 날선 시선들을 확인하며 쭉~~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장면이다.

 

‘아담’의 자존감을 되살리는 동기가 되어주다

‘아담’이 달라진 자신의 몸을 인정하면서부터 달라진 생활 방식, 달라진 이동수단의 작동방법,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달라진 방법까지 새로이 배워야 했고 적해야 했다. 이 때 활동을 돕는 예브지나는 ‘아담’이 스스로 하도록 자극하고 지지와 격려로 또 적절한 거리를 두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방식의 지원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장애에 맞는 보조기와 편의시설, 24시간 서비스 되는 장애인콜택시 그리고 지속적인 재활치료 연계 등 제도의 뒷받침, 그리고 직장과 가족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그 사회의 인식 등은 ‘아담’이 자존감을 빨리 회복해, 온전히 ‘아담’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동기가 되어 주는 든든한 지지대들이었음이 분명히 전달된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장애인콜택시 만해도 대도시에서만 24시간 서비스가 되고 지역에서는 운행시간도 제각각일뿐더러, 이용횟수의 제약도 있다. 중소도시나 지방에서는 공휴일에 차량을 운행하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으면 이용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 가려면 그 지역 장애인콜택시에 등록해 경계지역까지 가 다시 예약해 바꿔 타야하고, 목적지 외 중간에 세울 수도 없다.

가장 문제는 언제 올지 몰라 한 두 시간 기다리는 게 기본이다. 이처럼 온갖 제약을 다 걸어 놓고는 어떻게 장애인의 이동 편의를 위한 교통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활동지원인은 어떤가? 생명과 연관된 지원을 매년 예산을 삭감해 할당 시간에 노심초사하며 줄다리기를 해야 하고 이마저도 65세 이상이면 지원이 안 된다. 이 모든 게 정부의 예산이 없어서 라고 하지만, 그동안의 태도와 정책방향,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복지관점에서 보면 과연 돈이 있다고 당사자 입장에서 지원들이 이뤄질까란 의문이 들 정도로 믿음을 주지 못했고, 신뢰를 쌓지 못했다.

장애에 맞게 개조된 차량이나 주거환경, 그리고 제활 훈련에 들어간 비용은 미국도 일정부분 개인 부담이고, 특히 의료보험가입이 의무가 아닌 미국에서 병원비와 재활치료비는 경제력이 있는 ‘아담’에게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빌려달라는 형의 부탁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에게는 일이 필요했고, 업무의 형태는 달라지겠지만 예전처럼 일 할 수 있을 만큼 건강도 회복됐고 능력도 있다.

때마침 사고 전 일했던 회사 상사가 다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 온다. 이 때 보인 ‘아담’의 표정은 지금껏 보여 왔던 표정과는 달랐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그래서 삶의 의지와 의미, 희망을 갖게 된 표정, 세상을 다 얻은 듯 자신감에 차오른 표정이었다.

장애를 우선하지 않고 능력을 우선하는 사회가 가진 힘이 아닐까? 잠시 뭉클했고 스톱시켜 이 표정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이라는 물음을 또 한번 되내이며.

이처럼 장애는 자신의 인정과 적응, 숙련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이고, 그 익숙해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아무튼, 아담>은 우리나라 복지의 가치나 방향이, 인간의 존엄함과 자존감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에 두어야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P.S. 이 영화는 2019년에 제작돼 2020년 개봉한 최신작인데, 왜 번역은 20C 일까?
장애인을 불구자나 환자로, 활동지원인을 간병인으로 번역한 이유, 그것이 알고 싶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