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있기 전, 우리 모두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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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19.06.02 1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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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증인' 리뷰

증인 (Innocent Witness, 2018 제작)
감독-이한, 출연-정우성, 김향기 외 | 한국 | 드라마 | 2019.02.13 개봉 | 12세 이상 관람 가 | 129분

영화<중인>. 정우성에게 제 5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안겨주었고, 오랜만에 배우로써 연기력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한 작품. 
정우성이 연기한 ‘순호’가 변호하게 된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성 장애를 가진 소녀 ‘지우’를 연기한 김향기의 호연과 연기 좀 한다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답게 매 장면 장면에서 공감을 주는 감정 선으로 몰입의 즐거움을 만끽케 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한 감독이 작품마다 보여준 따뜻한 세계관이 더해져 대중성과 작품성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를 얻어냈다.

특히 이 영화의 미덕은 그동안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범하는 오류들(장애는 극복되어지는 것이라면서 개인의 의지와 노력 등의 초점을 맞추는 장애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부터, 그렇기에 장애는 개인이 감수하고 감당해야 할 삶의 한 부분쯤으로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인식의 오류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장애의 특성만이 전부인 양 이 틀에서 개인을 단정 짓고 규정해버리는 일반화의 오류들을 범하며 ‘나와 다른 존재’로 잘못 인식시키는 오류들이 그것이다.)을 정공법으로 풀어낸다는 것에 있다. 

즉 자폐성 장애를 극복의 프레임 대신 존중과 이해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당신들이 먼저 이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며 다른 소통방식을 가진 이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기본임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감각적으로 새로운 환경이나 관계들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에 서로를 충분히 알아가며 친숙해질 시간이 필요하고 그래야 자신을 편안하게 내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실 정치인 같이 필요에 의해서거나 특별히 사교성이 뛰어난 사람이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지 않은가. 어찌됐든, 이런 과정에서 소통과 관계가 형성되면 그 간극은 자연히 좁혀지는 것이고 그 어떤 지원보다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들이 그렇듯, 장애와 관련된 문제들도 결국 서로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고, 소통과 관계로 해결되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영화<증인>은 이 과정에서 전해지는 현실의 인식과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들,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감각적인 어려움 등을, 관객들이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영화적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점만으로도 의미 있게 기억될 좋은 영화이다. 
그러나 장애에 대한 이해에 무게를 두다보면 자칫 ‘차이’와 ‘다른 점’이 도드라진다는 사실, 즉 좀 더 사람이야기라는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했다는 것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자폐성 장애인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영화<증인>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을 둔 검사가 ‘자페성 장애를 가진 증인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순호’의 물음에 이런 답변을 했다. 이 대사는 이 영화 제목에서부터 플롯, 캐릭터의 면면에서 볼 때 중심 명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영화에 대한 칭찬 일색의 평가들에, 약간의 삐딱한 시선을 보내게 되는 몇 가지 이유들 중 가장 큰 이유가 된 대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한다. 
한 예로 한 단어 시기인 영유아들도 맛있는  과자를 더 먹기 위해 과자를 숨겨두고 다 먹었다는 제스처와 또 달라며 손을 내밀고 재롱을 부린다. 다만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이 성인만큼 정교하지 못해 'White lie'(눈에 보이는 거짓말) 즉 정교한 전략을 세우지 못해 거짓말임이 뻔히 보이고 숨겨둔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숨겨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쉽게 발각될 뿐이다. 이처럼 인지와 언어의 발달이 초기인 유아들도 자신의 이익과 보호를 위해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거짓말의 본질은 자기 방어를 위한 본능적이고 반사적인 기제이지 싶다. 

이런 맥락에서 “자폐성 장애인은 거짓말을 못합니다.”라는 단정적인 대사는 의도가 어찌됐던 자폐성 장애를 가진 이들을 본능적인 반응조차도 어려운 사람들로 오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대사였으며, 같은 이유로 ‘지우’를 마냥 착하고 순수한 이미지로만 채색하는 것에도, 우려스러운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발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거짓말을 못 할까? 그것도 ‘지우’처럼 인지와 언어능력이 천재수준인 사람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이를 닦지 않았는데 귀찮거나 혼날까봐 닦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이 사소한 일들에, 순간순간 자신의 보호와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같은 대사는 현실 왜곡은 물론이고, 장애를 결함으로 보며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거리감을 갖도록 유도케 다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결국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만 인식되고, 우리 모두는 사람이라는 본질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지우’의 천재성. 글쎄요~??  

이는 주인공 ‘지우’의 천재성과도 연결된다. ‘지우’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인지능력이 좋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두 돌 무렵에 “기저귀 갈아주세요.”라는 문장으로 첫마디를 떼었고, 두 살 때는 한글도 줄줄 읽었을 정도로 언어적으로 천재성을 보인다. 언어뿐만 아니라, 암산, 퍼즐 맞추기, 음악 등 인지영역, 특히 수, 장면 등에 대한 기억력도 천재적이다. 또한 청각은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법정의 시계 초침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예민하며, 앞집 할아버지를 살해하면서 범인이 중얼거렸던 말들이 들릴 정도로 발달했다.

이뿐인가. 어두컴컴한 밤에 앞집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살인범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인식해내고 넥타이에 잔잔히 새겨진 점들이 몇 개인지 순간적으로 스캔하는 울트라 급의 시력을 가졌다. 사회성에 장애가 있을 뿐 모든 면이 완벽한 ‘지우’. 이보다 더 적합한 증인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짜 맞춰진 캐릭터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어떨까? 물론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 서번트 신드롬, 즉 결핍에 의해 한 부분의 감각이 특별히 발달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장애인들 중에서도 천재는 극소수이듯,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극소수라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영화에서 자폐성 장애는 천재성이 수반되는 것으로 오해할 만큼 고정화 된 캐릭터가 되어 등장하고 있고, ‘지우’의 경우도 언어와 인지 그리고 청각과 시각까지도 천재성을 보이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평범한 일상의 행복, 평범한 이웃으로 나름의 소통방식을 존중받고 이해 받기를 원하는 대부분의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의 욕구는 무시 된 채, 그저 스토리를 위해, 스토리에 의한 ‘특별한 장애인’을 양산해내며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로 현실 왜곡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 같은 결말

무엇보다 영화<증인>의 결말은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그동안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 열망하고 한목소리로 외쳐왔던 통합교육과 탈 시설에 반하는 것이어서 가장 우려스러웠다. 

학교 친구들의 따돌림과 재판과정에서 받은 상처, 그리고 함께 다니던 친구에게 당한 폭행과 폭언 등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지우’와 가족들은 결국 특수학교를 선택한다.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정의를 위한 소신 하나로,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며, 자신에게 상처 주는 말들만이 난무하는 법정에 쓸 결심을 한 아이였고, 학습 능력도 좋은 편이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지우’가 보이는 행동들을 ‘지우’다움으로 바라봐주고 다가간다면 비장애 중심의 학교에서 충분히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아이다. 이런 아이가 왜 특수학교를 선택하는 결말을 보여줬을까?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함께 어울리며 살아갈 권리를 가진 시민, 함께 뛰놀고 공부할 권리를 가진 학생이라는 명제를 부정하며 격리와 분리, 배제를 지향하는 우리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려 했던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와 소수를 구분 짓고 비장애 중심인 사회를 지향하며, 이들이 주도하는 정책이나 제도로 사회가 돌아가는 현실에서 이 같은 결말이 주는 의미를, (씁쓸한 우리의 이기적인 자화상) 제대로 캐치해내는 관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더욱이 “특수학교에서 공부하니 좋냐”는 ‘순호’의 질문에 “정상인 척 안 해도 되 좋아요.”, “그동안 정상인 척 연습했어요.”라는 ‘지우’의 대답이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순간적으로 같이 보던 관객들은 멍해지고 숙연해지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던 것 같았고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 극장을 나오며 저마다 ‘아이가 좋다는데 됐지’, ‘장애중심의 생활공간인 특수학교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무래도 아이한테는 더 편하고 행복하겠지.’ 라는 말들이 오고갔다. 이 모습을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면 저런 말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 제한된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사는 삶이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는지? 놀라웠고, 좀 심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세상 어디든 자유롭게 활보하며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다양한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들이 서슴지  않게 나올 수 있을까?라는 의문들이 들면서 염치란 것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잘못된 인식의 골이 이렇게 깊었던 것인가를 다시금 곱씹었다. 

이 같은 결말이 소수,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격리와 분리를 당연시 하는 정서에 편승하도록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효과가 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우려와 함께,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들에 삐딱 선을 타게 한 결절적인 이유가 되었다.      

정우성은 대상을 받으며 “선입견은 편견을 만들고, 편견은 차별을 만든다.”라는 명언과 함께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대의 그림자에 밝은 빛이 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나에게 영화 <증인>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려고 노력한 영화이지만, 본질에 대해 좀 더 깊은 성찰과 좀 더 농익고 영근 인식이 필요했던 영화. 그래서 시대의 그림자에 밝은 빛이 될 뻔했던, 아쉬움으로 남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P.S.
이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외적인 특성을 가지고 집작만으로 쓴 대사들이나 캐릭터들이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에 쓰이며 오직 영화의 주제를 쉽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되는 것은 다름에 대한 본질을 왜곡하고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싹을 뽑아버리는 것일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를 보내고 싶어졌다. 

이유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나 장애를 가진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이 일상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세상이 장애를 바라보는 ‘나와 다른 존재’라는 시선, ‘인간’이라는 본질 이전에 ‘장애를 가졌다’는 외피가 우선적으로 스캔되며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양산되는 수많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대중의 기호와 선입견에만 기대어 반복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은 편견을 만들고 편견이 차별로 이어지는 현실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콘텐츠 제작자들이나 제작 현장에서는 알기나 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