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서울시장은 안되나요?…'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출사표
장애인 서울시장은 안되나요?…'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출사표
  • 웰페어이슈(welfareissue)
  • 승인 2021.02.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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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장애인 스탠드업 개그맨 한기명씨가 뉴스1과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다. 2021.1.27/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장년의 정치는 장년들이 만들고 청년의 정치는 청년이 만들잖아요. 장애인의 정치는 우리 장애인들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돼보지 않았는데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국내 최초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기명씨(26)는 시종일관 대화 속에서 웃음을 찾으려 했다. 코미디언이기에 항상 재밌어야 한다는 압박이 직업병처럼 붙어 다녔다. 하지만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는 전혀 웃기지 않은 진지한 단어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기명씨가 웃기지 않은 정치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가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정당의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탈시설장애인당은 장애인 단체가 설립한 '위성정당'으로 정식 설립 신고를 한 정당이 아닌 '가짜정당'이다. 4월 보궐선거를 위한 정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문을 닫을 정당이지만 후보 선출과 공약 발표를 통해 '진짜 정당'들에게 장애인 정책 입안을 압박하기 위해 설립됐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기명씨는 탈시설장애인당의 후보가 된 이유에 대해 "저는 당당하게 장애인들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라며 "장애인들도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취지로 후보를 하겠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짜정당, 가짜후보이긴 하지만 장애인 스스로가 권리를 주장하고 이를 실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정치는 장애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장애인들이 지역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에는 그 벽이 높기만 하다. 지난 2018년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당선된 자치단체장 중 장애를 가진 이는 허태정 대전광역시장과 배광식 대구 북구청장이 전부였다. 4년 전인 2014년 선거에서는 5곳의 기초자치단체장에 장애인 후보가 당선됐었다. 지방의회 역시 마찬가지로 서울시의원 110명 중 장애인 의원은 김소영 의원 1명뿐이다.

정치적으로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탈시설장애인당은 서울에만 분야별로 11명의 후보를 냈다. 기명씨는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맞게 문화·예술 분야를 담담하게 됐다. 그의 공약은 서울을 '문화·예술 배리어프리 도시'로 만들어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시장이 된다면 장애인이 문화·예술을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직접 창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2018년 9월 열린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서 한기명씨가 공연을 하고 있다.(한기명씨 제공)© 뉴스1

 

 


기명씨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께서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렀다가 미술 작품을 감상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어통역사를 요청했지만 미술관에서는 통역사가 배치되지 않았다는 겁니다"라며 "(저는)미술관에서 시각장애인 분들이 편히 보실 수 있도록 점자 안내판을 설치하고 청각장애인 분들을 위해 수어통역사를 배치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기명씨는 본인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삶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탈시설장애인당의 다른 후보들이 낸 공약에도 기명씨는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는 정당의 이름으로 내세운 '탈시설'을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꼽았다. 본인은 시설에서 생활해 본 적이 없지만 시설 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주변 장애인들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는 "시설에 갇혀 있는 분들을 보면 저는 진짜 안타까워요. 그분들은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고 계시니까요. 저는 저희 당의 공약대로 시설을 없애고 그분들이 자립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기명씨는 일곱살 때 태권도 학원 차량에서 내리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6개월을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 상태로 보냈다.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났지만 왼쪽 뇌의 손상으로 오른쪽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됐고 왼쪽 귀도 들리지 않는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기명씨가 처음 본 TV프로가 '개그콘서트'였다. TV에 나오는 코미디언들의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자신도 사람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꿈꿨다.

그러다 문득 "장애가 가진 나를 방송국에서 코미디언으로 써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직접 방송국 오디션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먼저 무대 위에 설 기회를 갖자는 생각이 들었고 장애인 극단에서 연극을 하면서 무대 경험을 쌓기로 했다. 2016년부터 연극을 시작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자는 마음에 2018년 1월 처음으로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게 됐다.

꿈을 계속 쫓아 왔지만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명씨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늘 도전하는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로 힘들었던 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왜 태권도 학원을 다닌다 해서 이렇게 장애인이 됐을까.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이렇게 됐는데. 제가 코미디를 하면서 하는 말이 있는데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에요. 이렇게 되는 순간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즐겨야죠"라고 답했다.

 

 

 

 

 

 

 

지난 29일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서 한기명씨가 탈시설장애인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연설을 하고 있다. © 뉴스1

 

 


지난해부터 대한민국을 덮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영향으로 기명씨가 설 수 있는 무대도 줄었다. 모임을 할 수 없으니 극장도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여러 가지 일들에 도전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 여행'을 기획하기도 했다. 또 독도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독도 문제를 알리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만 26세가 된 기명씨는 "올해로 장애 20주년을 맞이하게 됐다"며 더 많은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오는 2월부터 새로운 무대에서 스탠드업 공연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또 최근 한국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게 돼 대학 새내기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한편 지난 29일 서울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서 다시 만난 기명씨는 오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출마 사실과 공약을 밝히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무관심하게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공약을 설명한 기명씨는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발언을 끝마쳤다. 가짜정당의 가짜후보지만 그의 진지한 모습은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