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삶의 주인공은 나야 나"
  • 백수정 (자유가고가)
  • 승인 2021.02.10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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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이 스토리 4'

토이 스토리 4 (Toy Story 4, 2019 제작)
감독_조시 쿨리
미국 | 애니메이션 외 | 2019.06.20 개봉 | 전체관람가 | 100분

어릴 적 나는 브레이스를 착용하고 도수 높은 안경도 쓰고 다녔다. 그래서 난 내가 로봇 같았고 로봇이라고 상상 하며 놀기를 좋아했다.

친구들도 나를 ‘원더우먼’이라며 선봉에 세우곤 해 의기양양해 하며 멋져 보이고 싶어 의자나 책상에서 뛰어내려 팔을 다치고 다리를 삐끗한 적도 여러 차례다. 그때의 나나 내 친구들은 내 도수 높은 안경과 보조기가 부끄러운 것,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러운 것이었으며, 다른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나의 파트너이고 상상놀이의 동무일 뿐이었다.

아빠는 안경 쓴 내 모습이 그 당시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원더우먼’ 같다며 늘 멋지다고 말씀해주셨고, 엄마는 내가 좋아하기도 했지만, 스커트나 원피스를 주로 사 주시면서, 브라운 컬러였던 내 브레이스에 어울리는 스타킹의 컬러를 얘기해주시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단순히 보조기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처럼 여겼고, 또 드러내놓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원래도 부모님 두 분 모두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셨고, 내 장애도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내 장애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부모님들도 포기가 안 돼 솔깃해지는 말, 바로 장애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이셨나보다.
내 의향을 묻지도 따지도 않고 치료라는 개념으로 행해지는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뿐만 아니라, 단 한 번의 시술 후 내가 완강히 거부해 접어버렸지만, 검증 안 된 침 치료까지 받게 하셨던 것을 보면 말이다.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내게 그냥 받아야 된다고만 받으면 좋아진다고만 하면서 치료실로 떠미셨던 그 때의 두 분의 그 간절하고 절박한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물론 그 때 착용하고 받았던 보조기와 재활치료들이 지금 나의 걷기와 소근육 활동, 말하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과의 달콤한 시간 대신에, 기가 쪽 빠질 정도의 고통과 땀이 수반되는 치료들을 받아야만 하는 어린 나에게 네가 중요하고 선택은 네 몫이라고 이야기 해주며, 판단할 수 있는 정보와 설명을 누군가가 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그랬으면, 그 시간을 좀 더 성실히 즐겁게 보냈을 것이고 나와 내 장애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지금도 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지금보다 더 나를 또 내 장애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난감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숙명을 거부하는 것도, 그 삶의 주인공은 나

내가 어릴 때는 지금처럼 영유아기 때부터 재활치료를 받는 것이 보편화되지 못했었다. 당시 치료시기가 빨랐던 편인 나도 유치원에 들어가서야 받았으니.

내가 촌스럽게 나 때는~ 을 들추면서까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의사소통이 충분히 되었던 나에게 왜 보조기를 착용해야 하며, 수술과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해줄 의지와 겨를을 내 부모님에게서 빼앗은 것은 무엇이며 어떤 기대치를 갖게 했던 걸까?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내 다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내 아이의 장애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사랑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비장애 중심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비슷하게나마 걷고, 잡고, 말해야, 한마디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맞춰야 조금이라도 편하고 안전하며, 차별을 덜 받는 사회이며 제도와 도시계획의 방향이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내가 어렸을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라는 극단적인 인식이 세상 저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낙태가 순리로 여겨지는 세상이 아니던가.

이런 사회에서 장애를 가지고 내 아이가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그 옛날 아빠, 엄마가 내 장에 대해 일관성 없이 보였던 양육 태도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또 걱정과 두려움을 대처하는 방식과 선택으로 이해는 되지만, 솔직하고 냉정하게 말해 동의와 지지는 보낼 수 없다.

그 당시 내가 원하고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재활치료나 내 장애가 고쳐질 수 있다는 말에 잠시 흔들려 받게 했던 모든 치료를 내가 선택하게 하고 그 결과의 책임도 성취감도 내 몫임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며 느껴지는 자기결정권의 존중감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 글의 주인공인 <토이스토리4>에서는 ‘우디’보다도 ‘포키’와 ‘보핍’, ‘개비개비’의 이야기가 내 동지애와 감정을 좀 더 건드렸고, 이제까지의 <토이스토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였다.

 

<토이스토리 4>는 9년 전 비가 퍼붓던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앤디’의 동생 ‘몰리’의 장난감인 ‘보핍’이 ‘우디’와 정든 장난감친구들, 그리고 ‘앤디’의 집을 떠난다. 떠나면서 ‘보핍’은 장식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사느니 정든 집과 친구들을 떠나더라도 내가 필요한 곳에서 사랑받으며 사는 걸 선택했다고 말하며 이것이 장난감의 숙명이며, 세상의 순리라는 것. 그리고 그 순리를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며 떠난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멋졌고 기품이 있었으며 당당해 보였다.

9년이 흐른 후 ‘우디’는 ‘앤디’의 장난감이 아니라 ‘보니’의 장난감으로 살고 있으며, ‘제시’에게 밀려나 옷장 속에서 먼지를 쓰고 ‘보니’의 선택을 기다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초조해 보이는 ‘우디’지만, 선택받지 못한 초조함이라기보다는 ‘보니’와 함께 하며 행복과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함이 더 커 보인다.

‘유치원 예비소집일 날’ 새로운 친구들과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며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보니’를 위해 ‘우디’는 ‘앤디’에게 해줬던 것처럼 ‘보니’의 가방 속에 스스로 들어가 함께 가 준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 틈에서 떨고 있는 ‘보니’를 숨어서 돕는 ‘우디’의 모습은 장난감 본분에 충실함으로만 여기기에는 너무 깊은 사랑이 느껴져,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짝사랑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동안 <토이스토리>는 아이 곁에 함께 하며 행복을 지켜주고 추억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의무와 버려지는 공포 사이에서 충돌하며, 아이의 선택만을 갈구하는 장난감의 이야기가 그려졌고, 매번 이런 충돌과 갈구가 결국은 아이를 위한, 아이에 의한 선택으로 ‘우디’는 아이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럴 때마다 ‘우디’가 너무 행복해보여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또한 ‘우디’ 자신이고 삶의 방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9년이 흐른 <토이스토리4>. 첫 장면에서 ‘보핍’이 한 밀이, 또 ‘주인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와의 재회, 새로이 등장한 ‘포키’와 ‘개비개비’는 왠지 이제까지와 다른 이야기, 다른 결말, 즉 ‘우디’에 의한, ‘우디’를 위한 선택을 준비하기 위한 포섭이 아닐까? 하는 추측과 확신 사이에서, 결국 ‘우디’와 영원히 이별해야하는 슬픈 엔딩이라도, 힘든 여정과 지금보다 안전하지 않아 보여도 온전히 ‘우디’에 의한 선택과 결정이라면 기꺼이 떠나 보내줘야 하고 그 삶 역시 응원해줘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다.

 

“이것이 나이고, 이대로의 나를 사랑해.”

장난감인 자신을 사랑한 ‘우디’는 그래서 장난감으로 사는 것을 최고로 알고 의무와 책임을 즐기며 보람과 성취감,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다.

이런 그 앞에 장난감으로 사는 것이 싫다며 거부하고 도망치며 아무리 이제부터 장난감이라고 말해줘도 끝까지 “난 쓰레기야.”라며, “쓰레기로 사는 게 편하고 안전하며 자유롭고, 쓰레기통에서 누워 있을 때가 가장 따뜻하고 포근하다”며 쓰레기 예찬론을 늘어놓는 고집불통의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하필 ‘우디’가 ‘보니’의 유치원 쓰레기통에서 주어다 준 쓰레기들로 ‘보니’가 만들고 이름까지 지어 준 ‘포키’였던 것. ‘포키’는 ‘보니’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이며,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자신은 사용하고 나면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하고, 버려질 때 비로써 자유로워진다는 ‘포키’는 쓰레기통만 보면 들어가려고 도망친다. 그럴 때마다 ‘포키’를 찾는 ‘보니’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우디’. 밤을 지새우면서까지 ‘포키’가 도망갈까 봐 지키는 ‘우디’의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했다. 이럴수록 우리의 ‘포키’는 쓰레기인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쓰레기의 삶을 예찬한다. 장난감의 삶도 무시하거나 혐오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쓰레기통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보니’는 자신에게서 느낀다는 ‘우디’의 말에, 순간적으로 ‘보니’의 품을 쓰레기통이라 여기며 따뜻하고 편안해질 수 있었던 것도, 사람이 볼 때는 움직이면 안 되고 주인이 원하는 곳에 있어야 하며, 그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장난감의 규칙을 반복해 말해줘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보니’와 ‘우디’가 보든 안 보든 도망치고, 쓰레기통만 보면 돌진하며 달리는 자동차에서도 뛰어내리는 등 자신의 생각대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그저 그것이 쓰레기인 자신이고, 그래서 자신의 달라진 환경과 상황도 쓰레기의 관점과 언어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즐겁고 행복질 수 있는,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임을, 그런 나를 사랑함을 보여주는 ‘포키’. 이 얼마나 탄력적이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가.

그럼에도 쓰레기통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게 잠든 모습의 ‘포키’를 외면하고, 쓰레기로써 존엄함과 그것이 ‘포키’ 자신인 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 오히려 포기하도록 부추기고, 쓰레기보다 장난감으로 사는 것이 더 옳고 좋은 것이라며 정상적이라고 강요하는 ‘우디’에게서 세상을, 일방적이고 편협하며 우월적인 가치에 매몰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은 참 쓸쓸했고 아팠다.

이런 시선과 태도는 특히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강하게 투영되고 시도된다.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설이 더 편하다며 시설로 보내는 것을 지향하고 좀 더 비장애인처럼 활동해야 편하고 안전하다며 휠체어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재활치료를 받게 해 보조기와 의족, 목발을 이용하도록 권하고 강요하는 세상이, 현실이 ‘우디’에게서 보였다.

 

‘치료와 보호가 능사가 아니야.’

이처럼 다름이나 다양성을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틀에 끼워 정상과 비정상으로만 인식한다면, 치료와 보호의 개념을 지향하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자연히 개인의 욕망이나 의사 등의 개별성과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것은 당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개비개비’에 비쳐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이 결함, 불량품, 비정상적이라 말하는 상태로 태어난 장난감 ‘개비개비’. 그래서 주인 없이 골동품가게에 갇혀 산다고 생각한다. ‘우디’를 납치해서라도 고쳐보겠다는 ‘개비개비’는 ‘우디’를 납치하는데 성공하고 그의 부품 일부를 이식 받아 목소리를 살린다. 하지만 ‘개비개비’가 그토록 장난감이 되어 사랑받고 싶어 했던 아이에게 또 버림을 받자, 그제 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선택받지 못한 것은 목소리 태엽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라는 것을.

결국 치료를 향한 마음을 접은 ‘개비개비’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우디’와 ‘보핍’의 지지와 응원이 기회를 만들어주었지만, 골동품 가게 탈출의 성공은 결국 ‘개비개비’의 욕망을 향한 도전과 의지, 결단이었다. 스스로 주인을 선택해 그토록 원하던 주인 있는 장난감의 삶을 살아 보게 된 것도 치료가 아닌 도전을 통한 성취였다. 치료가 전부라 생각했을 때는 갇히고 외면당했지만, 그 틀을 깨고 나오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욕망이 보이고 도전을 통해 욕망이 내 것이 되는 기회와 결과가 찾아 온 것이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생각은 내 장애를 고치고 바꾸려하기에 앞서 자존감의 형성과 회복 그리고 자기결정권의 존중을 받아본 경험의 축척이 내 삶이 내 것이 되는 디딤돌인 것이다.

이를 시사하는 ‘개비개비’는 그 어느 캐릭터보다 내가 가장 동지애를 느끼고 공감했던 캐릭터였다.

비정상적이고 이상하다는 세상의 시선에, 당사자의 자존감으로 태클을 걸다

세상은 나의 다름을, 나의 장애를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하며 결함 혹은 이상함으로 여긴다. 그래서 잘못되고 틀린 것이라며 치료를 해 고쳐줘야 하고 기술 개발로 없애버려야 하는 존재들로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은 무시되기 일쑤며 일방적으로 정한 규정 안의 모습과 방식으로 사는 것이 옳고 정상이며 완전하다고 집요하게 다그친다.

웬만한 용기와 확신, 의지 없인 어떤 사람이라도 거역하기 어려울정도로 촘촘하고 깊이 얽어매놓고 박아놓은 인식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이에 드리운 영향력 중에는 미디어 즉 신문, 방송, 영화 공연 등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재생되는 다름이나 다양성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 특히 장애를 재현하는 방식이 깊이 관계되어짐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영화 <두개의 빛: 릴루미노>에서는 릴루미노 앱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언어장애를 가진 ‘엘라이자’가 보조기를 이용해 목소리를 낸다. 두 작품 모두 사랑할 때나 행복할 때 보조기나 기술의 힘을 빌려 장애를 사라지게 한다. 이 장면들에서 전해지는 것은 서로의 감정을 전하고 확인하는데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큰 장애라는 것, 말하고 보는 것을 감정교류의 전부로 한정 지음으로써 장애를 더욱 장애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사랑의 감정이고 행복의 감정인 것을.

그래서 우리는 ‘그럼에도’의 ‘포키’가 필요하고 ‘치료가와 보조기의 도움이 아닌 도전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내가 가진 욕망이 내 것이 되고 내 삶의 행복이 되는 기회를 갖는 ’개비개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러진 팔을 아무렇지 않게 테이프로 감아 붙이고 드러내놓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보핍’의 쿨함과 고양이에게 물어 뜯겨 몸과 다리가 분리돼 따로 돌아다니는 ‘더그’에게 “네 다리 간수 잘 해.”라며 대수롭지 않게 알려주는 ‘보핍’. 그러자 “걔는 왜 거기 있대.”라며 태연히 받아치는 ‘더그’의 여유가, 광고처럼 점프를 못한다고 버려진 스턴트맨 ‘두크’의 무모해 보일 지라도 도전해보는 배짱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세상의 시선, 그 세상에서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친구들이 가장 필요하다. 그래서 세상이 비정상적이라고 혹은 결함이라고 말하며 버려지는 아픔과 차별, 혐오를 당했던 이들이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며, 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모두 그렇다고 태클을 걸어 줄 필요도 있다. 이는 이 작품 초반에 흔치 않은 초록색 인공와우를 당당히 드러낸 아이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도 연결된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다름에 대해 또 장애에 대해 어떤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 태도와 인식이 작품 안에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가 잘 드러나는 <토이스토리4>. 매번 생각할 거리를 건네며 감동을 주었지만,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전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로, 한층 성숙해져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웠다.

이처럼 세상의 잘못된 인식을 비틀어주고 태클을 걸어주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며칠 전 본 다큐멘터리 <느려도 괜찮아>에서 “우리 아이가 온전히 ‘자립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아버님의 한발 나아간 말씀이 소원이 아니라, 권리로써 당연시 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자립’이라는 행위의 언어는 자존감이라는 감정의 언어와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요즘은 어릴 때부터 나와 내 장애에 대한 자존감, 즉 나를 사랑하고 내 장애를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이것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자아와 자기애, 자기결정력이 충만하도록, 또 이를 지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도록 돕는 것이 중요함을 점점 더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장애로 인해 일상에 불편함을 겪더라도 “일어나 걸어라”보다는 “(걷지 않아도 좋으니) 네 방식대로 일어나”는 주장이 합당한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김원영의 책 <사이보그가 되다> 서문 중 한 문장을 발췌하며 글을 맺는다.

 

P.S.

<토이스토리> 1 ~ 4까지, 그리고 디즈니와 계열사의 모든 작품은 ‘한국어 배리어프리’ 버전이 제작되지 않고 있다. 디즈니 코리아는 알고 있나?

모든 사람들은 보고, 듣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지며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 당연한 권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시 되지 않는 세상이다. 이 작품에서도 이런 세상을 향해 잘못되었고 틀렸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작품에 대한 좋은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일 것이다. 아이들과 디즈니의 모든 작품에서 ‘한국어 배리어 프리’ 버전을 하루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