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가 속도를 제어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사가 속도를 제어할 수 있을까
  • 승근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6.04 02: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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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불평등, 에너지의 공정성
과연 누가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설 수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은 기술혁명의 깊이와 범위가 상상 이상이고, 게다가 속도까지 빠르다는 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이 깊이와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정책이다. 그러나 정책으로 누가 제어할 수 있을까. 

정부와 국회는 가시적인 지표와 빠른 성과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기업 역시도 속도가 빠른 것이 이윤의 추구에도 유익하다. 결국 이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계층은 시민사회, 특히 사회복지사들이다.

지난 2016년 세계사회복지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주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증진’이었다.

대회 개회식에서 예기치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개회식 단상에 올라가 장애등급제 및 부양의무제 폐지를 촉구하는 피켓 기습시위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처참한 복지현실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들은 경호원에 의해 무참하게 끌려 나와야 했다. 그들이 단상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보건복지부가 그들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외면하게 때문이었고, 마침 대회에 당시 보건복지부 정진엽 전장관이 참석하기에 이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전장연의 활동 중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시외고속버스의 저상버스 도입이 있다. 장애인 등의 이동약자들도 명절에 고향에 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저상버스가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이유이다. 빨리 출발하여야 하는데 휠체어를 타고 내리는 그 시간만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속도가 느려진다.

세계사회복지대회에서 그들이 끌려 내려와야 했던 이유도 불편함에 있다. 예정되지 않았던 그들의 등장으로 그만큼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해진 매뉴얼대로 식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내빈들에 대한 예우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이 아닌 사회복지 동료들이었고,  주장은 정당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침묵했다. 정작 그들을 옹호해 준 사람들은 대회에 참석한 외국의 동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라는 공동행동을 통해 세계사회복지대회 폐막식에야 공식적인 질의응답을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사회복지사들이 기술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을까?

주어진 절차와 예우를 맹목적으로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한, 결코 제어할 수 없다.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책이기 때문이다.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정책을 제시해야 하지만, 절차와 예우의 대상이며 성장주의자인 정부와 국회, 기업들에게 과연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1970년대의 경제개발 시기, 정부는 속도를 내기 위해 고속도로와 철도를 건설했다. 이때, 가난한 사회적 약자의 속도는 고려되지 않았다. 고려되었다면 정부가 원한 속도를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속도에 희생을 당한 이 시기 이후로, 이동약자들은 이동권의 확보를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부의 속도에 대해 시민사회나 그 누군가가 그것을 제어하였다면 저상버스 도입이라는 것이 그렇게 힘든 정책은 안 되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속도를 선택한 것이었다.

2016년 세계사회복지대회에서의 일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언젠가는 또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속도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함께 올라갈 것인가. 주어진 절차와 예우를 뒤로하고 잠시라도 속도를 멈추기를 희망해본다.

급변하는 혁신은 대다수의 집단에게 이익을 주기는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요구한다. 점진적 혁신은 비록 속도는 더디어도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정부나 시장은 급변하는 혁신에 매력을 느낀다. 이윤창출과 정권의 유지 때문이다. 때문에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집단은 우리들이다.

2019년 봄, 7일 동안 고농도의 초미세먼지(PM-2.5)가 지속되어 미세먼지조감조치가 발효된다. 환경재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항력적이라 사람들은 애먼 하늘만 바라 볼 뿐이었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90% 이상은 공장과 자동차, 발전소 등에서 발생함으로 미세먼지는 인간에 의한 환경재앙이다.

해결은 너무나 간단하다. 자동차 이용을 줄이고 공장과 화력발전의 가동율을 감소시키면 된다.

자동차의 운행을 제한하는 차량2부제를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환경운동단체도 이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이산화탄소와 질소산화물을 많이 배출하는 사람들은 빠르고 큰 차를 타는 부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차량이 한 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차량2부제를 시행하였을 경우, 그들은 짝수 차와 홀수 차를 번갈아 이용함으로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다. 실제 멕시코의 사례도 있다.

반면 소형 또는 경차를 이용하는 차량 한 대를 소유한 서민들의 발이 묶여 버린다. 그들은 부자보다 이산화탄소와 질소산화물을 덜 배출했다. 하지만 정책의 대상은 그들을 향한다. 결국 부자들이 배출한 먼지에 의해 서민들의 차를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일찍 출근해야 할 것이고 집에 늦게 귀가하게 될 것이다.

인본주의 급진적 사상가 이반일리치(Ivan Illich)는 그의 저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에너지 사용에 상한선을 두는 것이야 말로 높은 수준의 공평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 에너지 소비의 한계를 인정하여야 하고 이를 넘어서면 불행이 온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속도를 내어야 하고 속도를 내기 위해 차를 산다. 그리고 차량대출을 내기 위해 속도를 내어 일해야 한다. 직장에 일찍 가고 늦게 퇴근하는 것은 빠른 차가 있고 교통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속도를 내기 위해 접근성이 편한 역주변이나 도심에 집을 구입하려고 한다. 속도를 낼 수 있는 집을 구매하기 위해 사람이 몰리다보니 집값이 오르고, 우리는 또 집값을 갑기 위해 속도를 낸다. 우리는 속도를 내기 위해 또 많이 일해야 한다. 모두 다 속도를 내다보니 차량이 몰려 도심이 정체된다. 미세먼지에 의해 뿌연 하늘을 탓하면서 당신의 차는 공회전을 하고 있다.

미세먼지의 원인도 바로 이 속도이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유해 배출물은 증가한다. 속도를 위해 공장이 가동되고 전기가 필요하다보니 화력발전소가 가동되어야 한다. 역시 유해 배출물이 증가한다. 우리는 이 속도에 의해 불행해지고 있으며 마침내는 숨쉬기 위해 차량을 멈춰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차량2부제는 권력자들의 대안이다. 동의할 수 없다. 미세먼지의 본질은 부자들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균형을 잃어버린 ‘에너지 공정성’, 속도의 문제이다. 성장이라는 신기루를 제시하면서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노동시간을 요구한 ‘불평등’의 문제이다.

공정성이 훼손되고 불평등이 야기되는 속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최대 제한속도는 120km이다. 그러나 자동차 계기판의 최대속도는 240km 이상이다. 제한속도는 정책이고 최대속도는 기술의 속도이다. 이동약자들이 자유롭게 시외 저상버스를 탈 수 있다면 120km의 격차이지만, 그들이 탈 수 없는 조건이라면 240km의 차별이 발생한다.

가진 자는 240km의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만큼이 불평등한 사회인 것이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주장처럼 에너지 사용에 상한선을 두든지, 아니면 시외 저상버스 도입을 목놓아 외치는 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몫이다.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속도 지상주의와 속도의 불평등 속에서 사회복지사들이야 말로 그것을 제어할 유일한 집단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