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야 행복한거야
아픈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야 행복한거야
  • 나눔과나눔 기자
  • 승인 2021.04.1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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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3월 장례이야기
(공영장례 빈소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는 ‘ㄱ’님의 사실혼 배우자)
(공영장례 빈소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는 ‘ㄱ’님의 사실혼 배우자)

당신이 있어야 내가 행복한거야

‘ㄱ’님의 장례에는 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례에 참여한 사실혼 관계의 아내가 빈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쓰러지듯 누워 ‘ㄱ’님을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고인 예식을 진행한 후에는 운구되는 관을 붙잡아 잠시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아내는 세상과 이별하는 매 순간 ‘ㄱ’님을 붙잡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장례에 참여한 사실혼 관계의 아내는 ‘ㄱ’님과 20년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살다 헤어졌습니다. ‘ㄱ’님이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생활력도 없었기에 함께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혼해야 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ㄱ’님과 아내는 같이 살던 집 근처의 공원에서 우연히 재회했습니다. 다시 만난 ‘ㄱ’님은 헤어지던 순간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이불을 겹겹이 둘러 덮고 노숙을 하던 ‘ㄱ’님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아내는 집으로 데려와 다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

눈이 많이 오던 2월의 어느 날 ‘ㄱ’님이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꼈던 걸까요? 갑작스러운 ‘ㄱ’님의 말에 아내는 치매가 왔냐며 퉁명스레 대꾸했다고 합니다.

“똥 싸는 남편이라도 옆에 있어야 내가 행복한 거야. 그게 행복이야.”

아내는 ‘ㄱ’님을 돌보고 임종까지 지켰지만 오래전에 이혼했기에 법적인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장례주관자로 지정 받아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기까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생전에 대퇴골 수술 후유증으로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꼈던 ‘ㄱ’님을 추운 안치실에 너무 오래 두었다며 슬퍼하는 아내의 눈에는 깊은 한이 담겨있었습니다.

 

(‘ㄴ’님의 장례에 참여한 이웃)
(‘ㄴ’님의 장례에 참여한 이웃)

제도 밖의 사람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믿어지시나요? 3월에 장례를 치른 ‘ㄴ’님은 만으로 50세가 넘었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었습니다.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자 지문을 찍어서 전국 경찰서에 돌리는 데만 두 달이 걸렸어요. 여기 가면 저기로 가라고 하고, 저기로 가면 다른 데로 가라고 하고…. 애를 많이 먹었죠”

살아있으나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도 밖의 사람인 ‘ㄴ’님을 위해 이웃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10여 년간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 ‘ㄴ’님의 주민등록을 위해 방법을 찾아보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도의 큰 구멍을 보게 되었다고 하네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아 모든 제도적 안전장치에서 배제된 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달을 ‘ㄴ’님을 위해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이웃들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병원을 찾은 ‘ㄴ’님은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가고 나니 못 해준 것만 생각이 나네요. 췌장암에 걸린 걸 우리가 빨리 알아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불쌍한 사람이 지독한 암에 걸렸어요. 통통하던 얼굴이 뼈랑 가죽만 남아버리더라고요”

이웃들은 ‘ㄴ’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배웅했습니다. 제도의 밖의 사람이었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ㄴ’님에겐 이웃이라는 이름의 가족이 곁에 있었습니다.

 

(‘ㄷ’님의 아버지가 아들의 유골을 산골하고 있는 모습)
(‘ㄷ’님의 아버지가 아들의 유골을 산골하고 있는 모습)

21세기의 아사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마다 관련 직종의 사람들은 생업이 흔들리곤 합니다. 중국인 ‘ㄷ’님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한국에서 중국 여행객을 상대로 여행사 가이드 일을 했던 ‘ㄷ’님은 사스, 사드, 코로나19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4~5년간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한동안 제대로 된 수입 없이 생활해야 했고, 그 탓에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어떻게든 스스로 상황을 해결해보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제가 지금 너무 상황이 안 좋습니다. 돈 좀 빌려주시면 나중에 꼭 갚을게요”

아버지는 평소 연락이 뜸하던 아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 또한 수급자로 생활하며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간병인과 식비, 병원비로 쓰라며 모아두었던 돈을 전부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어떻게든 아들을 돕고자 일을 알아보았는데 일을 하면 수급비가 끊긴다는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ㄷ’님의 시체검안서 속 직접사인은 ‘급성심장사 추정’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무래도 ‘아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ㄷ’님에게 굶주림은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길에서 정신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져 이빨이 나갈 정도였다고 하네요. 일상화된 굶주림이 ‘ㄷ’님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간 것 같습니다.

‘ㄷ’님의 아버지는 아들의 부고를 가장 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90년대에 아내와 이혼하고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아들과의 가족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중국에 있는 다른 형제와 어머니, 한국에 있는 사촌들은 찾았지만, 아버지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시간 동안 쌓인 안치료는 아버지가 아들의 장례를 치를 수 없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또, 서류상으로 친부임이 증명되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경찰과 구청 두 군데에 자신이 ‘ㄷ’님의 친부임을 설득하고 시신위임서를 두 번이나 작성하는 괴로운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20대 청년의 장례에 참여한 친구가 고인에게 쓴 편지)
(20대 청년의 장례에 참여한 친구가 고인에게 쓴 편지)

20대 청년들의 장례

3월에는 20대 청년의 장례가 두 번 있었습니다. 경칩과 춘분을 지나며 이제는 완연한 봄이 다가왔습니다. 미처 꽃 피우지 못한 청춘들을 배웅하며 이제는 아픔 없이 편히 쉬라는 인사를 건네봅니다. 8천만 원에 달하는 병원비 때문에 가족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들에겐 부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슬픔이 주어지기를…. 고인의 아픔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며 자책하던 친구들의 죄책감이 덜어지기를….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자식의 장례를 포기해야 했던 이들에겐 가슴 찢어지는 긴 후회의 밤이 찾아오지 않기를….

나눔과나눔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이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 모두를 기억하겠습니다.

<이 글은 나눔과나눔의 그루잠 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3월 무연고 사망자(기초생활수급자 45명 포함)

이주영, 최원호, 박충근, 이창길, 김기태, 차명해, 신용애, 김미정, 박재연, 김대훈, 이종옥, 전영주, 박근희, 김지환, 김익윤, 유명석, 조정미, 노성진, 정기영, 정서희, 권오영, 박홍, 김요한, 박영수, 임순임, 박양호, 정성화, 안소례, 이옥신, 최미화, 이은주, 배철효, 서무향, 하한연, 박인호, 박종익, 조규훈, 명성용, 한장길, 이용상, 김승영, 신관철, 오유신, 이규성, 박창식, 박영실, 정호, 정군식, 이춘강, 윤달주, 채영순, 민영은, 김일환, 길대석, 권명수, 이종환, 권명희, 김예진, 서명남, 김영철, 심현상, 진영우, 이장수, 이길식, 심경섭, 심재봉, 이종수, 오금세

 

나눔과나눔이 함께 마지막을 동행했던 예순 여덟 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

나눔과나눔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외롭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Re’member

나의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순간을 공감하는 것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

(문구출처 : 마리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