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사랑’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지 못한 영화 '조제'
‘순수한 사랑’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지 못한 영화 '조제'
  • 백수정 (자유기고가)
  • 승인 2021.05.26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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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Josée, 2020)

감독_ 김종관

출연_ 한지민, 남주혁 외

한국 | 멜로 | 2020.12.10 개봉 | 15세 이상 관람 가 | 117분

* 영화 전개나 결말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2004년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2020년에 리메이크 한 한국영화 <조제>. 
개인적으로 원작의 ‘조제’ 캐릭터를 워낙 좋아했기에, 촬영 전부터 이 당차고 사랑스러운 ‘조제’를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기대감에서라기보다 우려를 더한)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여성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현재의 인식에서 더 나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지 못 했고, 멜로에서 그동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와 사랑을 풀어내는 방식은 매번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구태의연한 전개와 결말을 보여주어 실망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원작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는, 이뤄져서는 안 되는 사랑이라는 암묵적인 사회의 통념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었다.

‘~을 초월한’, ‘~에도 불구하고’의 순수한 사랑. 그 이면

영화 <조제>의 김종관 감독은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조제’와 ‘영석’의 (장애를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을 감상 포인트의 하나로 꼽았다. 전 후 문맥 상 괄호 안의 문장이 강하게 전달되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따끔따끔 거리며 잘 삼켜지지가 않았다.

대부분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의 홍보문구와, 이를 위한 인터뷰에서 늘 감독들은 말한다. ‘장애를 초월한’, ‘장애에도 불구하고’의 순수한 사랑을 보여주겠노라고.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순수성은 엄밀히 말해 사랑의 본질이고 사랑을 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본능과도 같은 감정이다. 이것이 위협받을 정도로 장애가 장벽이며, 이 사회에서 이질적이고 용납되지 못하는 혐오의 존재인가 라고 반문을 한다면 내가 배배 꼬인 사람일까?

더더욱 기분 나쁜 건, 이 ‘~를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라는 문장에는 다름 또는 소수자성에 대한 우리네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을 인정한다는, 그래서 다수에 속해 있다는 우월감이 내포된 동정과 시혜의 시선, 즉 온정적 시선이 바탕이 된 불평등한 관계에 동의 한다는 전제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순수한 사랑’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지 못한 감독의 인식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답변에서 영화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거부감이 앞서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보고나서도 이 부분은 역시 대중문화, 즉 미디어가 비춘, 세상이 보는 여성이면서 장애를 가진 나. 그 생경하고 유쾌하지 않은 만남에 매번 당황스럽고 분노하게 되는 쳇바퀴를 다시금 돌려야만 했다.  

 

‘조제’의 전동휠체어는 늘 고장 나 있다

보통 영화의 첫 장면은 감독의 관점과 의도, 이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내포된다.

한 여성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고, 그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휠체어는 옆으로 넘어져 허공에서 돌고 있는 바퀴만 클로즈 업 시켜 잡는다. 한 남성이 달려 와 “괜찮으세요?”라고 물으며 여성을 안아 올려 의자에 앉힌다. 이 과정을 하이앵클과 롱테이크로 촬영해 한 컷 한 컷 끊어가는 단면 샷이 아니라, 위에서 응시하며 내려다보듯 한 눈에 들어오는 전면 샷으로 보여 준다. 자연히 ‘조제’의 장애가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시야로 들어온다. 

시작부터 ‘조제’라는 사람 보다는 그의 장애가 우선 인지되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다. 영화<조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조제’의 집 마당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는 전동휠체어는 늘 고장 나 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타고 다니는 모습은 단 한 장면도 연출되지 않았다. 

“고쳐 달라”는 말 뿐, 고치려는 마음도 없어 보이고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저 ‘영석’에게 업혀 다니거나 ‘영석’이 수동 휠체어에 태워 밀고 다니는 장면들뿐이었다. 심지어 ‘조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요리였는데, 이마저도 ‘영석’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볼 수 없어졌고, ‘조제’가 그토록 읽고 싶어 했던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영석’이 혼자 서점에 가서 사온다. 엔딩 컷 전에 조제가 홀로 여행을 가서 상상하는 신에서조차도 ‘영석’의 등에 업혀 있다.

물론 서점 관련 에피소드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나갈 수 없고 다닐 수 없으며 머물 곳에 편의시설의 미흡함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긴 하지만. 이마저도 주도적이지 못한 ‘조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조제’를 설명해주고 보여주고자 하는 에피소드들에 가려져 소모될 뿐이다. 이 장면들이 함께 다니고 함께 즐기는 모습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함께 하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면 어땠을까?

언뜻언뜻 비장애중심의 불평등한 사회를 비추는 장면들, 예를 들어 “난 편한데, 넌 왜 내가 불편하다고 생각해.”와 같은 사람들의 장애에 대한 선입견을 빗댄 ‘조제’의 대사나, 유일하게 ‘조제’의 의지로 만든 관계, “엄마가 그리워 ‘엄마’하며 우는 아이들을 패는 아이의 엄마가 되어줬다.”는 양아들의 이야기가 허언증과 망상으로 보이기보다 의미가 되어 전해졌을 것이고, ‘조제’와 ‘영석’, 이 둘의 관계와 이별도 공감할 수 있는 개연성을 좀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내가 여기저기 다 소문 낼 거야.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강제로 범했다고.”

‘영석’과 사랑을 나눈 후 ‘조제’가 한 말이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조선시대에도 쉽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21세기 여성에게서 듣다니.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시 돌려 다시 보았다. 똑같은 대사가 리플레이 될 뿐이었다. 

이 같은 대사를, 그것도 ‘조제’ 입을 통해 내뱉는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넣을 수 있는 김종관 감독. 
그의 여성에 대한, 장애에 대한 인식이 충격적으로 다가 왔고, 이 후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분함과 더러움이 삭혀지지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조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 대사를 ‘조제’ 스스로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자기의 사랑을 자기 스스로 모독하고 자기가 한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부정하고 조롱하며 우롱하는 것이 된다. 

감독과 ‘조제’ 입장에서 백번, 아니 천 번을 생각해, 당참과 ‘영석’에 대한 깊어진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이해해 보려 해도 당참은커녕 비굴하고 굴욕적이어서 치욕스러워서 욕이 저절로 나온 장면이었다. 

강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눈 후였다. 이런 여성이 그 사랑에 대한 부정과 혐오를 담아 저런 말을 저리도 태연하게 농담하듯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여성, 장애를 가진 여성은 세상에 없다. 장애여서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반 페미니즘이고 반 휴머니즘인 대사에 분노해야 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조차도 거의 언급 하지 않는다. 인식하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바로 이 처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원작에서는 어떻게 연출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을 할 수가 없다. 성스런 의식을 치루 듯, ‘조제’가 먼저 깨끗한 요를 정갈하게 깔고 스스로 옷을 벗는 장면으로 ‘조제’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사랑,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어 ‘츠네오’가 “눈물이 날 것 같다.”라는 말로 고마움과 ‘조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사랑을 나눈 후 ‘조제’가 “난 네가 좋아. 모든 것이 좋아”라며 ‘츠네오’의 품에 폭 안기는 장면으로 처리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고 감동했던 장면이다. 이런 장면을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게 훼손시키고 왜곡시키면서까지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 명확한 이유를 끝까지 찾지 못해, 심한 표현이고 공개적인 글에 쓰면 안 되는 표현인 줄 알지만 기분 더러웠다.

 

과거 여성성에 요구된 서사와 캐릭터,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 전이돼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는 1985년에 나온 소설을 기본으로 해 배경이나 서사에 그 시대 일본의 장애인식과 여성인식이 배어있지만, ‘조제’ 캐릭터나 화법은 영화 제작연대인 2000년데 초 그 또래 여성들의 사고와 인식이 드러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밝고 세상에 대한, 또 지적 호기심이 많으며 당당함과 통통 튀는 매력이 전해졌었다. 

그 후 10년 넘은 세월이 흐른 2020년에 우리나라에서 재탄생된 ‘조제’는 1985년 원작 소설의 서사와 그 시대 여성성에 요구됐던 캐릭터와 서사를 답습하며 여전히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삶의 의지 없이 살아가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의 감독이 이들의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서 ‘조제’ 중심에서, 온전히 그녀의 선택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대사와 에피소드, 리엑션 하나하나, 소품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반면, 2020년 리메이크된 <조제>는 ‘조제’가 가진 장애 중심에서, 좀 더 어둡고,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좀 더 의지나 목적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상황들이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둡고 우울한 회색빛의 이미지로 채색된, 밖으로 나오는 것부터 사랑과 이별의 과정 과정을 ‘영석’에게 키를 쥐어 주고 백마 탄 왕자의 구원만을 기다리는 ‘디즈니’의 공주 같은  ‘조제’로 비춰졌다. 그래서 두 작품의 결말 장면, 헤어진 후 전동휠체어를 타고 혼자 장을 보러가는 2004년 ‘조제’의 뒷모습과 차를 직접 운전해 할머니의 유골함을 모시기 위해 납골당으로 향하는 ‘조제’ 뒷모습의 여운과 겹쳐지지 않았고, ‘조제’의 집을 나오면서 통곡하는 ‘츠네오’의 감정과 우연히 차 속에 있는 ‘조제’를 보고 소리없이 통곡 하는 ‘영석’의 감정이 겹쳐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듯 봉건시대에서나 봄직한 순예보적 순수한 사랑방정식에(드리워진 가부장적적이고 남성 우월적 시선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덧씌우는 불평등한 관계의 사랑을) 21세기에 대입해 무엇이 전해질까? 또 2020년 ‘조제’에게 여성, 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들이 어떤 부분에 공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통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임에도 전국관객수가 21만명(포털사이트를 통해 본 관객을 포함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봄)으로 개봉 당시 예매율 1위로 선전했다. 평점은 8.21점(네이버 영화 평점)으로 높다. 수치로만 보면 통했고, 전달되는 무언가가 공감을 자극했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단언컨대, ‘조제’만을 생각해보면 현실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여성들의 생각과 행동, 의사결정 이에 따른 표현과 소통, 의식의 차이가 너무 커서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성 캐릭터가 21세기에 가능했던 것은 ‘조제’가 장애를 가졌다는 것 때문이다. 
과거 ‘순수한 사랑’을 내세운 멜로물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캐릭터와 서사를, ‘장애를 가진’이 주는 편견에서 비롯된 무시와 혐오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를 구현해내기에는 충분조건이지 않은가? 여성이면서 장애를 가진 나에게 이 영화는 그래서 많이 불편했고, 많이 거슬렸고, 한숨이 저절로 나온 기분 더럽고 나쁜 영화였다.

사실 이 둘의 사랑이야기 사이로, 짧게짧게 가볍게 연출되는 혈연 중심의 틀을 깬 가족형태, 할머니와 ‘조제’ 그녀의 양아들의 관계나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선 사람들, 그리고 취업, 계약직, 얄팍한 봉급으로 어렵고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내 마음과 눈에 좀 더 담아졌다. 

‘조제’만 하더라도 주민등록이 말소돼 장애인등록이 안 되고 복지 지원도 거의 못 받는 상황이다. 이밖에도 취업준비생인 ‘영석’의 에피소드들이나, 사회복지사의 열약한 근무환경과 적은 봉급을 전하는 공간인 고시원 관련 에피소드는 생각해볼 사회 문제다. 

그러나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사라지거나 흘려버릴 정도로 잠시 언급만 할뿐이거나 그저 권력에 지배당하고 목적이나 신념 없이 그 집단에 편승하려는 보편적이지 않은 청춘의 모습으로, 또 잠시 본능을 해소하는 공간으로만 소모시키는 듯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