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내아들 집에 간다.
나는 막내아들 집에 간다.
  • 이혜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2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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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하얀 거짓말을 지켜 드리기

 

설날이나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노인주간보호센터 종사자들은 긴장한다. 이번엔 어떤 어르신에게 변화가 생길까? 매번 그래왔다. 어르신을 주로 모시는 자녀 집에 모두 모여 심각한 회의가 펼쳐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못 모시겠으니 너희들 중 이 짐을 덜어달라”, “나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 나만 자식이고 너는 자식이 아니냐”

한순간에 짐이 된 어르신은 당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의 거처가 명절 안에 결정될 거라는 달라진 집안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다.

40년 넘게 큰아들과 큰며느리와 함께 살던 C할머니의 운명이 이번 설날에 정해졌다. 자녀들은 요양원에 모시기로 한 것이다.

치매 어르신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어떤 괴로움인지, 실제적인 고통과 압박이 얼마나 큰지 안다는 말은 가족들에게 그리 큰 힘이 되지 못한다. 진정 힘이 되려면 그 부양 부담에서 벗어나는 실제적인 대책이 따라야 한다. 다른 자녀들도 모셔보던가 모두 상황이 쉽지 않다면 요양원에 입소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다. 오래전이야 요양원에 모시면 부모님을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이제 효도의 방법이 달라졌다. 전문적인 서비스를 어르신도 누릴 수 있고, 자녀들 또한 자신들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으니 모두가 행복한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경우에 따라 주간보호센터 이용이 더 이상 어려울 것 같은 어르신과 그 가족분들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요양원 이용이 어떻겠냐고 말씀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여전히 요양원 선택의 길은 당사자 어르신과 가족들에게 오랜 고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르신들 세대에서는 자녀들의 부양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자녀들과 같이 사는 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혼자 살고 말지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들어가면 다시는 가족들을 볼 수 없을거라는 오해가 그렇게 만든다. 버려졌다는 배신감과 상실감도 더해진다.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요양원 내 학대 뉴스에 우리 부모님이 당하지 말란 법이 없으니 어르신과 가족들의 요양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다 라고 말씀드려도 설득이 어렵다.

오해와 편견과 고정관념은 치매 어르신의 부양 부담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C할머니 자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명절 연휴가 끝나고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C할머니와의 이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두려웠다. 우리 센터를 가장 오랫동안 다니신 분이고, 그 누구보다 우리의 애씀을 이해하시며 늘 고마워하시는, 큰 힘이 되어주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C할머니가 일주일 전부터 “나는 이제 곧 막내아들 집에 가요. 아쉽지만 그렇게 됐어요. 여기 동무들과 선생님들 이제 못 봐서 어쩌지”라며 이별 멘트를 우리에게 하셨다. 어? 요양원으로 가신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가족들이 C할머니께 차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고 요양원으로 모시는 걸까? 아...그러면 우리 할머니 어쩌지? 안타까움과 불안함에 전전긍긍했다.

C할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았지만 다행히 진전 속도가 빠르지 않다. 지남력, 기억력, 주의력 등이 상대적으로 양호하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크시고 감사한 마음을 자주 말로 표현하시는 다정한 분이시다. (어느 어르신이 요양원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들으시면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던 C할머니다. 나는 큰아들 집에 사니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하셨던 분이다.) 이런 분이 막내아들 집에 간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갑자기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면 그 무너진 마음을 어떻게 어르신이 감당하실 수 있는지 걱정되었다.

나는 며칠 끙끙 앓다가 가족들을 만났다. 막내아들 집에 간다는 거짓말 대신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고 솔직히 어르신께 말씀드려달라 부탁드렸다. 가족들의 결정은 번복할 수 없지만(내가 감당할 수 없으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 최소한 어르신의 동의와 마음 준비가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어머님 요양원 가시는 거 다 알고 계세요. 당연히 어머님과 상의하고 허락받았죠. 근데 막내아들 집이라뇨?”

C할머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구나.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막내아들 집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을까.

“우리 막내아들은 OO시에 살아요. 집도 얼마나 큰지 몰라. 깨끗하고 밝고. 또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잖아요. 이제 막내아들 집에서도 살아봐야지...”

일주일 내내 막내아들 집에 가게 되어 다행이라고, 효자인 막내아들을 자랑하셨던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혹시나 나와 직원들 그리고 다른 어르신들이 요양원에 가게 된 자신을 불쌍하게 볼까 걱정하셨나 보다. 자식들이 불효자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우셨나 보다. 그래서 생각해 내신 것이 막내아들 집에 간다는 거짓말이셨나 보다.

센터를 마지막으로 나오시던 그날도 끝까지 막내아들 자랑을 하고 가셨다. 나는 모른 척했다. “어르신 저 다 알아요. 거짓말 안 하셔도 돼요. 가시는 요양원 정말 좋은 곳이에요. 요양원에서도 지금처럼 열심히 운동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셔야 돼요” 이런 말은 어르신께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저 “효자인 막내아들과 즐겁게 사시길 기도할게요”라는 말이 최고의 마지막 인사다. 어르신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는 방법이다.

때로 어르신의 거짓말을 알게 되었을 때 모르는 척이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된다. 평생 일하느라 허리 한 번 펴본 적 없는 엄마의 피 같은 돈을 몽땅 가로채고 가출한 아들을 “우리 아들 나에게 효도하려고 큰돈 벌기 위해 서울 갔어요” 세상 제일가는 효자라고 거짓말해도, 수 년째 연락 한 번 없는 딸이 이번 명절에 살짝 다녀갔다는 바램 같은 거짓말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런 믿음이 정말 그런 아들, 딸로 만들 수도 있으리라.

C할머니가 앞으로 지내시게 되는 요양원은 다행히 내가 아는 곳이라 원장님께 각별히 부탁드렸다. 막내아들 집 같은 그곳에서 지금처럼 평안하시길 늘 기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