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에 필요한 것은 신뢰와 결정권이다
혁신에 필요한 것은 신뢰와 결정권이다
  • 승근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1.12 07: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은 논증되었는가?
기본소득제는 논증이 필요한가?
혁신은 신뢰와 결정권, 그리고 민주주의

2019년 노벨경제학상 3명의 공동 수상자인 에스테르 뒤플로(Esther Duflo, 1972~), 뒤플로의 남편인 아비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 1961~), 그리고 마이클 크레머(Michael Kremer, 1964~)는 빈곤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게으름과 어리석음, 무능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기에 의한 말라리아에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기장을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원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해이를 들이대며 모기장을 무료로 배분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실험결과, 무료로 많이 나눠줄수록 말라리아가 감소한다.

예방접종에 대한 유무료에 대한 논란도 무료로 하면서 동시에 콩 1kg을 나눠줄 때 접종률이 가장 높았고 당연히 빈곤층의 생존률도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들의 연구방식은 무작위대조군연구(randomized controlled trials, RCT·무작위 방법론)로써 무작위로 통제 실험을 하고 그에 입각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빈곤문제의 대안을 주장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원을 배분해 보아야 허튼 곳에 쓴다. 그러하니 많이 주면 안 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최저생계비이다. 그만큼만 살게 해주고 그 이상의 삶은 가난한 사람들이 해결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원을 배분해 보아야 허튼 곳에 쓴다.’ 라는 이 주장은 그 어떤 연구로도 증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논리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절대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한 것이 현사회의 폭력이다. 빈곤은 갈수록 격차가 커지고 사람들은 그 격차만큼이나 동기가 저하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비근거적인 논리는 가난의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는 꼴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라는 논리는 증명된 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빈곤의 논리도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 가설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으로 실현가능성이 높아야 재원이 지원될 수 있다는 논리는 현재의 상황을 방기하는 것이며 빈곤해결에 적극적 관심이 없는 것이다. 프로포절의 심사에서 ‘제안하는 그 프로젝트가 실현가능성이 있나요? 경험적 근거나 논리적 근거가 있나요?’라고 묻는 행위는 무지하다.

만약, 노벨경제학자 3명의 연구자에 의한 이러한 시도가 실현가능성이나 논증의 결여로 지원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유의미한 연구결과도 얻을 수 없다. 비록 실현가능성이 없고 논증된 바도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거야. 그리고 인류는 인간을 잘 알지 못해.’라는 가설과 명제만으로도 사회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기본소득담론으로도 이어진다.
기본소득반대론자들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기본소득제 실험, 핀란드의 실업자를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제실험이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도 실패할 것이라는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실험디자인에 따라, 그리도 나라의 문화와 국민인식에 따라서 실험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캐나다와 핀란드의 실험은 1~2년이었고 아직 그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기본소득에 대해 본 사례를 실패로 단언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라는 증명되지 않는 논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국민 기본소득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기회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무상급식도 그러하며 무상교복도, 청년수당도 그러하다. 가난한 이들의 실현가능성을 한 번도 논증되지 않은 경험에 비추어 예단해 버렸다.

우리의 문화는 지독히도 실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루살이도 아닌 인간이, 1년 단위 사고의 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1년 살이 성과에만 집착한다. 그럼으로 1년 안에 다루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실험은 실패를 의미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나라에 노벨경제학상이 나올 수 없다. 혁신도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그저 정책결정자의 양심의 동요나 예산부서의 통이 큰 결정에 기댈 뿐이다.

이제, 조직으로 들어가 보자.
‘직원들은 자발적이지 않아, 관리가 필요하고 때로는 통제되어야 일을 해.’ 라는 테일러식 과학적관리론에 대한 주장은 100년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어디에도 없다.

반면 ‘아니야, 사람은 본질적으로 훌륭해, 그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고 권한과 자율을 주면 성과가 높아.’라는 주장들이 경험적, 지속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의 조직은 테일러리즘을 신봉한다.

인본주의에 의한 조직관리를 시도하려고 했을 때, ‘실현가능성이 있을까? 정말로 직원들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성장할까?’라는 의문도 결국에 시도를 해봐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논증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며, 경험적 근거와 논리적 근거를 들이대는 현장의 구태의연한 문화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논증과 마찬가지로 직원들은 명령과 통제로만 작동한다는 고정관념으로 조직과 사람을 이해해 버린다. 그러한 방법이 편하고 실패하지 않으며 굳이 논증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민주주의는 논증되지 않았다. 경험이나 논리성 역시도 확보되지 않은 사상이다. ‘다만 공산주의를 선택한 사회는 몰락했으나 민주주의를 선택한 사회는 성장했으니 이것이 더 낫다.’ 정도의 논리일 뿐이다. ‘그러함에도 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가?’ 3명의 노벨경제학자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논증은 아프리카 케냐로 국한된다. 최종 논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함에도 왜 노벨경제학상이 그들에게 돌아갔는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물질의 세계는 더 이상 확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것들이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는 확증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확증될 수 없는 영역이다.

결국 빈곤이나 민주주의나 조직이나 결과로 증명되기 보다는 과정 속에서 그 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답이 혁신을 선물할 것이다. 그럼으로 진정으로 혁신을 원한다면, 실현가능성이나 논리성, 근거 등 이론가들이나 정책결정권자들의 주장들은 잠시 뒤로하자. 사회복지가 인간존엄과 배분적 정의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TED] 빈곤퇴치를 위한 사회학적 실험 중 예방접종을 위한 통제된 실험 Esther Duflo회색은 통제 실험지역, 파란색은 예방접종을 위해 캠프를 설치한 지역은 17% 접종률 상승, 빨간색은 캠프와 콩1kg를 지원한 지역은 38% 접종률 상승
[TEDEsther Duflo]빈곤퇴치를 위한 실험 중 예방접종을 위한 통제실험
회색은 통제 실험지역, 파란색은 예방접종을 위해 캠프를 설치한 지역은 17% 접종률 상승, 빨간색은 캠프와 콩1kg를 지원한 지역은 38% 접종률 상승

혁신에 필요한 것은 신뢰와 결정권이다.
모기장을 선한 곳에 활용할 것이라는 신뢰이다. 그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딸랑 한 개 주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많이, 그리고 유료로 하여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 무료로 하여 결정권을 보장하여 준다. 무료로 지급하게 되면 그렇게 남은 소득으로 다른 것을 구매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도록 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무료의 예방접종도 결정권을 보장하여 주는 것이며, 1kg의 콩을 나눠주어 그것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결정권에 위임하는 것이다. 만약 유료라면 모기장과 접종으로 자신이 가진 소득의 결정권이 상실된다. 그들 입장에서도 모기장과 접종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구매 결정이 있기에 구매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도 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와 결정권이다.
기본소득을 선한 곳에 사용할 것이라는 신뢰, 그리고 소득의 선택권을 통해 사람은 더 풍요로워 질 것이고, 더 나은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야 말로 기본소득의 가치이다. 물론 헛되이 소득을 사용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상위1%의 부자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소득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제도를 통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실험을 강구한다면 비용의 효과도 더 높아질 것이다.

상위 1%의 비용선택에 의해 효과가 낮을 것이라는 주장은 의미 없다. 정책결정에 있어서 상위 1%의 필요와 선택을 주요변수로 하는 것은 어리석다. 결국 인간을 신뢰하고 실험하여, 그 결과를 최종적으로 논증하면 될 일이다.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신뢰와 결정권이다. 조직민주주의도 논증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논증될 수 없는 영역이며 결국 결과가 아닌 과정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지는 신뢰와 결정권이 구성원들에게도 통용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같은 훌륭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인간이기에 마땅히 신뢰받아야 하며 결정권이 주어져야 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사자주의, 임파워먼트, 사람중심 케어를 주장한다면 구성원들 역시도 그러한 존재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결정권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혁신 역시도 그러하다. 인간존엄과 배분적 정의의 사회복지도 역시 그러하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상 논증된 하나를 제시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혁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사회복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