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지만 잘 알지 못 합니다
가족이지만 잘 알지 못 합니다
  • 나눔과나눔 기자
  • 승인 2020.08.0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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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6월 장례이야기
(사진 : 무연고 장례에서 나눔과나눔 활동가, 자원봉사자, 의전업체 직원이 산골을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
(사진 : 무연고 장례에서 나눔과나눔 활동가, 자원봉사자, 의전업체 직원이 산골을 진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

 

“부양하지 않았다”
2020년 6월 초 어느 날 무연고 사망자 ㄱ님의 장례가 오후 2시에 예약이 되었습니다.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시립승화원(이하 승화원)으로 가는 나눔과나눔 활동가의 휴대전화가 오전부터 뜨거워졌습니다.

남동생의 무연고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누나는 자신이 원하는 종교로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미 다른 종교단체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어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니 사진을 찍어 보내드릴 것을 약속하고 어렵게 전화를 끊었지만 영 마음이 편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승화원에 도착한 후 다른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ㄱ님의 유가족이라고 밝힌 젊은 여성은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친척과 함께 승화원에 도착했다고 전했습니다. 잠시 후 그들을 만났고, 전화를 건 여성은 자신이 ㄱ님의 딸이라고 밝혔습니다.

화장절차가 시작되었고, 공영장례 전용빈소에서 장례식과 종교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예식 내내 딸은 덤덤한 모습이었습니다. 조심스레 고인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딸은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나눔과나눔에서 보낸 장례 안내문자를 받았고, 무연고자가 확정된 아버지의 장례가 공영장례로 치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딸은 애초에 장례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식으로서 해야할 마지막 도리를 하러 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장례 전에 고모로부터 전화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니 딸은 얼굴을 붉히며 “절대 사진을 보내주지 말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세한 가족사를 알 수는 없지만 관계가 좋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ㄱ님의 서류를 정리하던 중 시신위임서를 확인했습니다. 서류에는 참석하지 않은 다른 자녀의 시신위임의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부양하지 않았다.” 같은 가족이지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진 : 관계가 단절되어 살아온 자녀와 사실혼 관계의 아내가 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에서 고인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사진 : 관계가 단절되어 살아온 자녀와 사실혼 관계의 아내가 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에서 고인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세 여자의 온도차
6월 중순 장례를 치른 무연고 사망자 ㄴ님은 지난 5월 말 서울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고, 연고자가 있지만 시신을 위임하여 무연고자가 되었습니다. 무연고 장례에는 세 명의 여성이 참석했습니다. 나이든 여성은 장례 내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했지만, 젊은 두 여성은 장례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ㄴ님의 사실혼관계의 아내는 갑작스럽게 사망한 남편을 보내기 힘들어 장례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사망진단서에 사인이 급성심장사로 추정되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젊은 두 여성은 자매로 ㄴ님의 자녀였습니다. 언니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살았던 기억으로 성인이 된 후 단절되어 살았다고 전했습니다. 좋지 않은 기억은 장례 내내 표정으로 나타났고, 오열하는 사실혼 아내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매 중 동생은 언니와는 달리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사실혼 아내가 오열할 때 같이 울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단절이 오래되어 언니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ㄴ님의 무연고 장례에서 자매는 아버지의 사실혼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사망소식을 듣고 나눔과나눔으로부터 장례일정을 안내 받는 과정에서 아내는 자매에게 아버지의 사진을 보냈고, 나눔과나눔은 그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화장절차가 끝나고 산골을 위해 유택동산으로 가면 딸은 아버지의 위패와 영정을 들었고, 사실혼 아내는 남편의 유골함을 들었습니다. 오열하는 아내과 애증이 섞인 언니, 그리고 묵묵히 따라가는 동생. 무연고 장례에 참석한 세 사람의 온도차가 장례 내내 느껴졌습니다.

(사진 : 노숙인 시설에 거주했던 한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에 생전에 가족처럼 지냈던 지인들이 참석했습니다.)
(사진 : 노숙인 시설에 거주했던 한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에 생전에 가족처럼 지냈던 지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가족이지만 아는 건 별로 없습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한 드라마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 상호간에도 그 기억은 조금씩은 다릅니다. 좋았던 기억이 가족 중 누군가에겐 끔찍했던 기억이 될 수 있고, 가족이지만 같이 살고 싶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는 드라마로 보여지고 있지만, 그들이 헤어져 산 후의 이야기는 세간에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진 : 관계 단절 후 무연고 사망자가 된 형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동생)
(사진 : 관계 단절 후 무연고 사망자가 된 형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동생)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관계를 끊고 산 형님
6월 중순 무연고 사망자 ㄷ님의 장례에 참석한 동생은 갈등이 많았습니다. 가족이었지만 오랜 세월 생사도 모른 채 단절되어 살았던 큰 형님의 사망소식을 듣고 장례에 참석해야 하는지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이 오갔습니다. 어머니와 다른 삼형제는 서로 연락도 하고 잘 지냈는데, 큰 형님은 20년 이상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습니다. 동생의 기억에는 특별히 가족 내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형님의 선택은 다른 가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연락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사도 가지 않고 지냈지만 형님은 끝내 연락이 없었고, 지난 6월 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형님의 마지막 주소는 서울시의 한 주민센터로 주거불명이었습니다.

동생은 아직 지방에 살고 있는 다른 형제에게 큰형님의 사망소식을 알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례가 끝난 후 동생은 가던 길을 되돌아와 장례 때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때는 가족이었던 형님의 소식을 안고 동생은 승화원을 내려갔습니다.

 

(사진 :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울음을 쏟아낸 아들)
(사진 :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울음을 쏟아낸 아들)

가족 이외에는 좋은 사람
6월 초 무연고 사망자 ㄹ님의 장례에는 아들과 손자가 참석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덤덤하게 장례식을 함께 하던 아들은 이내 말문이 트였고, 아들이 전한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자신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혼자 외롭게 사신다고 다른 동네분들이 잘 돌보셨나 봐요. 제주도도 함께 놀러 다녀오시고, 잘 사셨나 봐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아들은 말을 이었습니다. “동네분들이 아버지 장례를 언제 치르는지 전화가 많이 왔어요. 장례일에 참석 못한다며 사진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시고. 좋게 지내신 분들이 많으셨나 봐요.”

공영장례 대상이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유골을 자연장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서울시 공영장례 최초 사례)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수골을 지켜보던 아들은 아버지 이름의 유골함이 나오자 갑자기 표정이 변했습니다. 장례 내내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를 품에 안고 아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살면서 맺혔던 마음이 풀린 듯 아들은 이내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사진 : 생전에 가족처럼 지내던 지인들이 무연고 사망자가 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사진 : 생전에 가족처럼 지내던 지인들이 무연고 사망자가 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형제처럼 지냈던 지인들
50세에 사망한 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에 세 분의 지인들이 참석했습니다. 폐암 4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친구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은 장례 내내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오갈 데 없이 외롭게 살았어요. 가족도 없고.”

지인 중 한 분은 고인을 친동생처럼 여겨 자신이 살던 집의 한 칸을 내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많이 아팠는데,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어요. 우리는 본업이 있으니까 아파도 그 친구 혼자서 병원에 갈 수밖에 없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누구라도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살았을 텐데……”
치료비를 대면서도 직접 병원에 데려갈 수 없었던 지인은 고인이 생전에 외로웠던 삶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잘 가라, 아프지 말고.”

가족이 없었던 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엔 피보다 더 진한 정을 나눴던 지인들의 배웅이 있었습니다. 삶을 함께했던 친구를 보내며 지인들은 미처 나누지 못했던 뜨거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상반기에만 무연고 사망자 300명 넘었다
2020년이 벌써 절반이 지났고, 6월 30일 현재 나눔과나눔이 장례를 치른 서울시 무연고사망자는 303명이 되었습니다. 작년 한 해 총 423명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렀고, 그 수치는 역대 가장 많은 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20년에 들어서 상반기 만에 300명이 넘어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월 31일부터 4월 19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80일 동안 무연고 사망자 장례가 있었고, 3월에는 무려 70분의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여름이 다가올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기록적인 수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무연고 장례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2018년 5월부터 시행된 서울시 공영장례가 2년이 지나면서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가족대신장례(법적 연고자가 아닌 이가 치르는 장례)’가 가능해졌고, 공영장례에서도 처음으로 ‘자연장(수목장)’ 사례가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연고 장례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도 많은 아쉬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 공영장례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는 나눔과나눔은 2015년부터 무연고 장례를 치르며 아직도 나아지지 않고 있는 지점들을 반복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의전 업무를 진행하는 지자체의 담당자는 6개월~1년 간격으로 바뀌어 연속적인 업무수행에 어려움이 있고, 입찰을 통해 1년마다 의전업체가 바뀔 때마다 무연고 장례 역시 방식이 바뀌어 적응하기에 적잖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좋은 제도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시혜적인 시각으로 무연고 장례를 바라보는 이들과 만납니다. 무연사회의 문제는 무연생(無緣生)을 살고 있는 현실로부터 접근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의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글은 나눔과나눔 활동을 지지하는 부용구 활동가가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6월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
조정애, 한나례, 김종수, 배기남, 정동웅, 최인희, 정지혁, 신복균, 최준식, 강수웅, 정성대, 정태호, 신현근, 박희옥, 김태영, 박정오, 김봉원, 최준영, 강환교

6월 무연고 사망자
이인석, 이봉춘, 신성자, 염휘숙, 안선기, 로버트, 신광우, 신재일, 김두겸, 전홍기, 이중호, 정운용, 백종철, 유소림, 김철원, 조번, 김상인, 주일남, 정대영, 신종철, 양승규, 김춘자, 서태호

나눔과나눔이 함께 마지막을 동행했던 마흔두 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
나눔과나눔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외롭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Re’member
나의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순간을 공감하는 것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
(문구출처 : 마리몬드)